제5코스 : 낭산과 국립경주박물관

[제5코스]우리나라 최초의 여왕과 함께 국립경주박물관 견학 가는 길 !!! 낭산과 국립경주박물관

  • 화랑교육원~10 산림환경연구원[30]~10 벌지지비[10]~5 망덕사지 당간지주[25]~15 사천왕사지[35]~10 선덕여왕릉[20]~10 능지탑[30]~20 황복사지 삼층석탑[30]~30 국립경주박물관[140]~20 화랑교육원

※ 도보 ~분 / 차량 ⇒분 / 유적지 내 체류 시간 [  ] / 중식 장소 밑줄

지도

답사 개요

  • 경상북도산림환경연구원에서는 힐링을 얻도록 합니다. 낭산에서는 선덕여왕과 불교에 관련하여 많은 사실을 학습하면서 자연을 느낄 수 있도록 합니다. 국립경주박물관에서는 신라인들이 우리에게 남겨주신 문화유산을 통해서 독특한 문화적 자양분을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하게 합니다.

유의 사항

  • 도로를 횡단하거나 따라 걷는 경우가 있으므로 교통규칙을 잘 지키고, 안전에 유의하도록 특히 주의합니다.
  • 점심과 물과 간식을 반드시 준비합니다.
  • 풀숲을 통과할 수도 있으므로 운동화에 긴바지를 착용합니다.
  • 유적 유물을 훼손하지 않도록 주의하여 관찰합니다.
  • 의문은 인터넷이나 해설사를 이용하여 해결하도록 합니다.
  • 몸에 문제가 있을 때는 재빨리 인솔교사에게 말씀드려 해결합니다.
  • 발굴현장에서는 책임자의 허락을 받은 후에 관람합니다.

 

1. 경상북도 산림환경연구원  

http://www.kbfoa.go.kr/?r=home

경북산림환경연구원은 1907년 4월 한국경영 묘포장으로 출발하여 1910년 경상북도 소속으로 변경되었으며, 1931년에는 경상북도 임업시험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해방 후 1961년에 농촌진흥원 임목양묘장으로 이름이 바뀌고, 1969년에는 경주시 배반동 현재의 위치로 옮겨왔다. 1993년 경상북도 산림환경연구소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2008년 현재의 이름으로 다시 바뀌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곳 연구원은 기후변화에 대응한 산림환경조사, 산림병해충의 친환경 방제, 유망 임산물의 소득화 연구, 산림의 효율적인 경영과 보호를 위한 임도 및 사방사업을 수행하는 산림 전문 연구기관입니다. 또한 야생화원, 무궁화동산, 산림전시실, 습지생태원 등 오랜 세월 가꾸어 온 아름다운 산림자원을 바탕으로, 해마다 약 30만 명 가량이 산림문화를 찾아 즐기는 쉼터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숲 해설 프로그램과 유아 숲 체험원도 운영하고 있다.

체험학습 과제

1

1-1. 꽃이 피어 있는 식물 옆에서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경북산림환경연구원’에 대한 느낌을 설명해 보세요.

2

꽃이 피어있는 식물 3종류의 사진을 찍고, 이름을 검색하여 기록하세요.

3

나무 세 종류를 선택하여 이름을 적고, 잎과 나무줄기의 특징을 기록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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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경주 벌지지비  

벌지지는 박제상의 부인과 관련되어 생긴 명칭이다. 박제상은 혹은 김제상(金堤上)이라고도 한다. 신라는 백제 세력을 견제할 필요에 의해 402년(실성왕 1) 내물왕의 셋째아들인 미사흔(未斯欣)을 왜국에, 412년에는 내물왕의 둘째아들인 복호(卜好)를 고구려에 파견해 군사 원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왜와 고구려는 이들 왕자를 인질로 감금하고 정치적으로 이용하게 된다.
내물왕의 큰아들 눌지가 왕위에 즉위 뒤, 두 동생을 고구려와 왜로부터 구출하기 위해 군신을 불러 협의하였다. 이 때 모두 박제상이 그러한 역할을 맡을 역량이 있는 적절한 인물이라고 천거하였다.
당시 박제상은 양산(梁山) 지방의 토호 세력으로서 삽량주간(歃良州干)이라는 직책에 있었다. 그는 418년(눌지왕 2) 왕명을 받들어 먼저 고구려에 가서 장수왕을 언변으로 회유해 복호를 구출하고 무사히 귀국하였다. 귀국하여 환영하는 연회를 행하던 도중에 임금이 왜에 인질로 가 있는 미사흔을 구출해 주기를 부탁하였다. 그는 집에도 들르지 않고, 왜로 떠나게 되니 이 말을 전해들은 부인이 쫓았으나 이곳에 이르러 따라가지 못함을 한탄하면서 두 다리를 뻗고 탄식하였다 하여 ‘벌지지’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왜에 이르러 마치 신라를 배반하고 도망해 온 것처럼 속였다. 마침 백제 사신이 와서 고구려와 신라가 모의해 왜를 침입하려 한다고 거짓으로 꾸며 말하였다. 이에 왜가 병사를 파견해 미사흔과 박제상을 향도(嚮導 : 길을 인도하는 사람)로 삼아 신라를 침략하고자 하였다.
왜의 침략 세력이 신라를 치러 오는 도중에 박제상은 강구려(康仇麗)와 협력해 왜병을 속여 미사흔을 탈출시키는 데 성공했으나, 그 자신은 붙잡혀 왜 왕 앞에 끌려갔다. 왜 왕은 그를 신하로 삼기 위해 온갖 감언이설과 협박으로 회유했으나, 그는 차라리 신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결코 왜의 신하가 될 수 없다고 해 끝까지 충절을 지키다가 마침내 유형에 처해져 불에 태워지는 참형을 받아 죽었다. 이러한 사실이 신라에 알려지자 눌지왕은 그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그를 대아찬으로 추증하고 부인을 국대부인(國大夫人)으로 책봉했으며, 둘째 딸을 미사흔의 아내로 삼게 하였다.

체험학습 과제

1

1-1. 벌지지비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박제상(혹은 김제상)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벌지지비에서 망덕사지를 바라보면, 망덕사지 아래 논 가로 계단지의 표지석이 보입니다. 계단이 그곳에서 시작되었다는 말은 신라시대 당시의 길이 지금의 논 높이였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렇다면 1000년 넘는 세월이 흘렀는데도 현재 논 높이인 당시의 지표면이 거의 변하지 않았다는 의미인데, 이렇게 높아지거나 낮아지는 변화가 거의 없는 이유를 토의하여 기록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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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경주 망덕사지 당간지주  

(보물 제69호)

망덕사지 당간지주는 높이 2.44m이며, 낭산(狼山)의 남쪽에 있는 망덕사 터의 서쪽에 있으며, 현재 있는 곳이 원래의 자리이다.
두 지주는 65㎝의 간격을 두고 동서로 마주보고 서있다. 겉면에는 아무런 조각이 없는데, 바깥면에만 양변의 모서리를 윗부분에서 아래로 1.57m 정도까지 깎은 장식적인 의장(意匠)이 보인다. 정상 부분은 안쪽 옆면의 윗부분에서 바깥면으로 내려오면서 반원형의 선을 그리고, 바깥으로 6㎝ 쯤 깎아 경사를 이루고 있다.
당간을 고정시키는 간(杆)은 윗부분 한 군데만 두었는데, 안쪽면 윗부분에 길게 네모난 간구(杆溝)를 파서 간을 설치하였다. 현재 지면이 깎여서 두 지주의 아랫부분은 상당히 노출되어 받침 부분이 드러나 있다. 주변에 아무런 석재도 남아 있지 않으므로, 원래의 간대나 받침 부분이 어떠한 모습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당간지주는 비록 각 면에 조각이 없지만, 조성 양식과 수법은 그리 발달되지 않았던 초기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망덕사는 685년(신문왕 5)경에 창건되었으므로, 이 당간지주도 당시에 함께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림

체험학습 과제

1

1-1. 망덕사지 당간지주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망덕사지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당간지주가 어디에 사용되던 유적인지 의미를 찾아서 기록하세요.

3

망덕사지에는 목탑이 동서에 있었는데 지금은 동탑의 흔적만 완전하게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한가운데 부처님의 사리를 넣는 네모난 사리공이 있는 심초석을 살펴보면 팔각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심초석이 제작당시에는 원래 사각형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흔적이 서쪽 심초석에 남아있습니다. 원래 사각형이었는데 임시로 팔각형처럼 가공되었다고 판단하는 이유를 토론하여 기록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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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경주 사천왕사지  

(사적 제8호)

경주 낭산(狼山)의 남쪽 기슭에 있는 신라의 절터로 경주 선덕여왕릉 아래에 자리하고 있으며, 사적 제8호이다.신라 문무왕 14년(674) 중국 당나라는 신라가 그들의 도독부를 공격한다는 핑계로 50만 대군을 일으켜 신라를 공격하려 하였다. 이에 문무왕이 명랑법사에게 적을 막을 계책을 구하자, 이곳 신유림에 사천왕사를 짓고 부처의 힘을 빌려 막아내도록 하였다. 그러나 당의 침략으로 절을 완성시킬 시간이 없게 되자, 비단과 풀로 신상의 모습을 임시로 만든 뒤 유명한 스님 12인과 더불어 밀교의 비법인 문두루법을 썼다. 그러자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풍랑이 크게 일어 당나라 배가 모두 가라앉았다. 그 후 5년 만에 절을 완성(679)하고 사천왕사라 이름하였다. 이곳은 원래 신유림이라 하여 신라인들이 신성하게 여기던 곳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선덕여왕이 죽으면서 도리천에 묻어줄 것을 유언했는데, 그곳이 낭산 남쪽이라 하였다. 여왕이 죽은 지 30년 만에 왕릉아래에 사천왕사를 짓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여왕의 예언이 맞았음을 알게 되었다. 불교에서는 우주의 중심에 수미산이 있고, 그 높은 중턱은 사천왕이 지키고, 산꼭대기에는 도리천이 있어 불국토가 시작되는 곳이라 믿었다. 이 설화를 통해 낭산을 수미산으로 생각했던 신라인들의 불국토사상을 엿볼 수 있다.절터에는 머리 부분이 없어진 귀부 2기와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진 비신 조각들 그리고 당간지주 1기가 남아있다. 특히 절 남동쪽에 남아있는 귀부는 사실적인 표현수법과 등에 새겨진 아름다운 조각으로 신라시대의 뛰어난 작품임을 보여주고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가장 먼저 지은 사천왕사는 전형적인 쌍탑식 가람 배치로 신라 호국불교의 성격과 신라인들의 불교관·우주관을 잘 보여주는 절이다. 경덕왕 때 향가인‘도솔가’, ‘제망매가’를 지은 월명 스님이 머물렀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사천왕사 앞길을 월명리(月明里)라고 하였다.

그림

체험학습 과제

1

1-1. 사천왕사지와 낭산이 함께 들어가는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사천왕사지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신라는 경주사천왕사를 왜 하필 그곳에 창설하게 되었을까를 토론하여 기록하세요.

3

신라가 경주사천왕사를 창설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를 토론하고 기록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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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경주 선덕여왕릉  

(사적 제182호)

신라 최초의 여왕이면서 제27대 왕인 선덕여왕(재위 632∼647)의 무덤이다. 높이 6.8m, 지름 23.6m의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무덤으로, 밑둘레에 자연석을 이용하여 2∼3단의 둘레돌을 쌓았다. 지금 우리가 보는 왕릉은 1949년에 많이 고쳐진 모습이다.선덕여왕은 아들이 없던 진평왕(재위 579∼632)의 딸로서 성골이라는 특수한 신라 왕족의식에 의해 여왕이 되었다. 첨성대와 분황사, 황룡사 9층탑 등을 세웠으며, 김유신, 김춘추와 더불어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았다.『삼국유사』에 의하면, 여왕이 건강할 때에 몇 년 몇 월 며칠에 내가 죽을 텐데, 죽거든 부처의 나라인 도리천에 묻어 달라고 하였다. 하지만 도리천은 부처님이 계신 하늘세계에 있기에 신하들이 이해를 못하자, 여왕이 직접 낭산(狼山) 정상이 바로 도리천이라 알려주었다. 문무왕이 삼국통일을 한 후 낭산 남쪽에 사천왕사를 지었으므로 사천왕사가 있는 곳이 사왕천이 되고, 그 보다 위에 있는 낭산의 정상이 도리천이는 것이므로 여왕의 뜻을 알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림

 

체험학습 과제

1

1-1. 선덕여왕릉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선덕여왕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선덕여왕은 여성이지만 지혜와 능력이 빼어났다고 합니다. 이를 세 가지로 정리한 설화가 있습니다. 인터넷에서 이를 찾아 토론하고 기록하세요.

3

선덕여왕은 많은 사찰을 창건하였습니다. 선덕여왕이 창건한 대표적 사찰은 어떤 것이 있는지 조사하여 기록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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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경주 능지탑지  

(경상북도기념물 제34호)

경상북도 기념물 제34호이며, 현재의 모습은 1979년에 보수할 때 임시로 정사각형 평면의 2층 석조 축단(築壇)으로 복원하였다. 기단부는 한 변의 길이가 12m, 높이가 1m인 석단으로 하고, 상부의 낙수면은 흙으로 덮고 잔디를 심는 방식으로 마감하였다. 둘레의 중대석에는 12지신상 9구를 방위에 맞추어 같은 간격으로 기둥처럼 배치하고 12지신상 가운데 뱀(남면)·범(동면)·용(동면) 등 3구는 없어졌으므로 상을 새기지 않은 돌못을 대신 세웠다. 현존 12지신상 중 일부는 낭산 동쪽 황복사지(皇福寺址) 앞에 있던 유구로서, 왕릉을 조성하려다가 버린 폐왕릉터로 추정된다.
갑석은 연꽃을 새긴 장대석과 정사각형 대석 두 가지인데, 정사각형 대석은 귓돌로 사용되었다. 1층탑신부는 탑신의 한 변이 6m이고, 기단부처럼 연꽃을 새긴 장대석을 얹었는데, 다만 상부에 굄돌 1단을 더 쌓고 흙을 경사지게 쌓아올려 네모지붕처럼 마감하고 중심부에 자연석을 마치 보주(寶珠)처럼 올려놓았다. 한편 연꽃을 새긴 장대석은 양식적으로 8∼9세기에나 제작되었을 것으로 보여, 석단형 유구가 후대에 조성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낳고 있다.
능지탑은 예로부터 능시탑(陵屍塔) 또는 연화탑으로 불려왔는데, 무너진 채 1층탑신 일부와 기단 약간만이 돌무더기처럼 버려져 있었다. 그러던 것을 신라삼산오악조사단(新羅三山五嶽調査團)이 1969년 이래 1971년까지 4차에 걸쳐 조사한 끝에 『삼국사기』에 기록된 문무왕의 화장터 유적으로 추정하였다. 이후 1975년의 해체·발굴조사에서 정사각형 석단 중앙부에 찰주석이 지층 아래까지 세워져 있고, 찰주석(擦柱石) 하부에는 공간을 포함한 토석 유구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 토석 유구와 주변 지층이 까맣게 그슬려 있는 것이 확인되어 화장묘(火葬墓)로 추정하였다.
그러니까 원래 창건 당시에는 목조건물로 된 묘가 있었으나 이것이 언제인가 소실되자 이 화장묘를 보존하고 예배하기 위하여 외부에 정사각형 석단을 축조한 것으로 추정하고, 이곳을 문무대왕의 화장 장소로 비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추정에 추정을 거듭하여 왔다.
한편 탑기단 내부에서 소조(塑造) 불상의 파편 여러 개와 수많은 기와조각이 출토되었다. 이것들은 통일신라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어서, 현존하는 석단 이전에 창건된 건물, 즉 문무왕의 탑묘(塔廟)에 쓰였던 유물로 추정하고 있다.
학술적으로는 이른바 방단형석탑(方壇形石塔)으로 분류되고 있는 이 탑은 원래의 모습을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규모의 평면에 5층으로 쌓아올린 석조 축단형 구조물이었을 것으로 짐작만하고 있다. 현재 터의 서쪽에는 보수할 때 사용하고 남은 연화석 36개가 쌓여 있어 원형을 모르고 그냥 복원한 사실을 알 수 있고, 그 옆에 성격이 구명되지 않은 흙더미 유구가 남아 있다.

체험학습 과제

1

1-1. 능지탑지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능지탑지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능지탑이 문무왕의 시신을 화장한 곳이라고 이야기한다. 어떤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를 조사하여 기록하세요.

3

국립경주박물관 신라미술관 1층 제1실 입구에는 이곳 능지탑에서 발굴된 소조불상의 파편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불상이 어디에 어떻게 배치되었는가를 조사하여 기록하세요. 이 불상들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를 함께 기록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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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  

(국보 제37호)

국보 제37호로, 통일신라시대 신문왕이 돌아가신 후 그 아들인 효소왕이 아버지의 명복을 빌고자 세운 탑이다.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으로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경주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국보 제112호)이 처음으로 삼층석탑이 조영된 뒤를 이어 세워진 경주 고선사지 삼층석탑(국보 제38호)이 거의 같은 크기로 조성되었다. 이들 탑에 이어서 10년쯤 뒤에 세워진 같은 삼층석탑이지만 규모가 작아지고 많은 부분에서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기단의 양식은 두 탑과 거의 비슷하나, 기단의 각 면에 새겨진 가운데 기둥[탱주]이 3개에서 2개로 줄어 있다. 탑신부도 여러 개의 돌로 짜 맞추는 대신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석탑의 양식이 달라졌음을 보여준다. 지붕돌은 윗면이 평평하고 네 귀퉁이가 살짝 올라가 경쾌하며, 밑면에는 5단의 받침을 두었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노반(露盤)만이 남아있다. 효소왕 1년(692)에 탑을 세웠고, 이후 효소왕의 뒤를 이은 성덕왕이 즉위한 지 5년만인 706년에 사리와 불상 등을 다시 탑 안에 넣어 앞의 두 왕의 명복을 빌고, 왕실의 번영과 태평성대를 기원하였다. 1943년 탑을 해체하여 수리하면서 2층 지붕돌 안에서 금동 사리함과 금불상 2구를 비롯하여 많은 유물을 발견하였는데, 그중 사리함 뚜껑 안쪽에 탑을 건립하게 된 경위와 발견된 유물의 성격이 기록되어 있어 탑의 건립 연대와 조성 의도를 정확히 알 수 있게 되어 매우 중요하다.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모습이면서도 전기 석탑양식의 변화과정이 잘 담겨져 있어 소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특히 조성된 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 있어 대단히 귀중하다.

그림은 탑과 한옥의 구조를 비교한 것입니다. 탑과 한옥의 구조를 비교하면 많은 점에서 비슷합니다. 기단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알아봅시다.

그림
  • 공통점 : 기초에 해당하는 기단을 가지고 있습니다.
  • 차이점 : 신라석탑에서 기단은 대개 2단이고, 한옥에서는 1단으로 되어 있습니다.

탑에서의 탑신과 한옥의 벽면을 비교하여, 공통점과 차이점을 알아봅시다.

  • 공통점 : 탑에서 한 층은 우주와 면석으로 이루어지고, 한옥에서는 기둥과 벽면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 차이점 : 탑의 면은 우주를 새기고 사이를 벽면으로 사용하여 한 돌로 조성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반면에 한옥에서는 모서리 기둥[우주] 외에 안기둥[탱주]을 여럿 가지고 있으며 벽면을 흙으로 만든다는 정도입니다.

체험학습 과제

1

1-1. 황복사지 삼층석탑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황복사지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경주 황복사지석탑은 삼층탑이라고 합니다. 3층이라는 것은 무엇을 기준으로 구분하는가를 기록하세요.

3

신라 석탑의 기본적 구성은 어떻게 되는가를 기록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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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국립경주박물관<성덕대왕신종>  

(국보 제29호)

국보 제29호로,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의 공덕을 널리 알리기 위해 종을 만들고자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사망하고 혜공왕 때인 771년에 완성되었다. 이 종은 봉덕사(奉德寺)에 달았으나 수해로 폐사된 뒤 영묘사(靈廟寺)에 옮겼다가 다시 봉황대에 종각을 짓고 보호하였다. 1915년 8월에 종각과 함께 박물관으로 옮겼고 국립경주박물관이 새로 지어 이사하게 됨에 따라 이 동종도 지금의 국립경주박물관 경내로 이전되었다. 일명 봉덕사종 또는 에밀레종이라고도 한다.
이 동종을 완성하였을 당시는 통일신라의 예술이 각 분야에 걸쳐 극성기를 이루던 시기로서,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이와 같은 우수한 작품이 제작되었다. 특히 이 동종의 명문은 종명(鐘銘)의 효시일 뿐만 아니라 문장면에서도 지극히 뛰어난 것이다. 지은 사람은 신라 혜공왕 때 한림랑급찬(翰林郎級飡)인 김필계(金弼溪)라고도 하고 김필오(金弼奧)라고도 하나 글자가 마멸되어 분명하지는 않다. 종명은 630자로 된 서문(序文)과 200자로 된 명(銘)으로 짜여 있다. 종명의 주제는 성덕왕의 공덕을 종에 담아서 대왕의 공덕을 기리고, 종소리를 통해서 그 공덕이 널리 그리고 영원히 나라의 민중들에게 흘러 퍼지게 해서 국태민안(國泰民安)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발원이 담겨 있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최대의 거종(巨鐘)으로서 제작 연대가 확실하고 각 부의 양식이 풍요 화려한 동종의 하나이다. 상원사 동종(국보 제36호)과 함께 통일신라시대 범종을 대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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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학습 과제

1

1-1. 성덕대왕신종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성덕대왕신종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우리나라의 종과 외국종의 차이점을 설명해 보세요.

3

종 위에는 대나무처럼 생긴 음관[음통]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지 토의하여 기록하여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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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국립경주박물관<신라역사관>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중심으로 차지하고 있는 신라역사관은 2층에 네 개의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다. 제1실은 신라의 역사가 시작되기까지의 시간 흐름을 따라 전시하고 있다. 입구의 반구대 암각화 복제품을 비롯하여, 구석기와 신석기 유물, 그리고 청동기시대를 이해할 수 있는 각종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제2실에는 금관총과 황남대총을 중심으로 신라를 대표하는 황금문화를 보여주는 전시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3실에는 신라가 경상북도의 작은 나라로 시작하여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원동력 가운데 하나인 각종 기록물 실물이나 복제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제4실에는 신라 황금기를 볼 수 있기는 하지만 석굴암과 같은 유적은 현장을 방문해야하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 전시실이다. 하지만 우물 출토 유물과 같은 독특한 유물들을 볼 수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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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학습 과제

1

1-1. 신라는 “황금의 나라”라는 말로 표현되듯이 금이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금관 앞에서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신라의 순금관은 몇 개인지 알아보고 금관의 용도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신라는 경상북도의 일부에서 시작된 작은 나라였으나 결국 삼국을 통일하였습니다. 삼국통일의 원동력에는 여러 요인이 있겠으나 일을 하면서 철저하게 책임을 지고 기록을 남겼습니다. 591년 남산신성을 쌓으면서 지역별로, 법식에 따라 일을 하여 3년 내에 무너지면 처벌을 받겠다고 하늘에 서약하는 비를 세웠습니다. 남산신성비 앞에서 사진을 찍어 보세요.

3

로만 글라스라 부르는 유리컵과 장식보검을 찾아 몇 전시실에 있는가를 기록하세요. 또, 이들이 신라에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토의하여 기록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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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국립경주박물관<신라미술관>  

명칭은 신라미술관이라고 표기되고 있지만 신라시대의 그림은 전시되어 있지 못하다. 신라의 미술품은 현존하는 것이 천마도와 같은 일부를 제외하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1층에 전시하고 있는 불교관련 유물로 탑과 관련된 유물이나 불상을 중심으로 한 조각품들이 전시되고 있다. 1층의 제1실에는 금동불을, 제2실에는 석조불상을 중심으로 다양한 종류의 석조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2층은 국은 이양선이 기증한 유물들로 전시실을 채우고 있는데 국보를 포함하고,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많은 유물이 함께하고 있다. 또 우리나라 최대 사찰인 황룡사에서 출토된 유물과 황룡사 모형을 전시하고 방 가운데는 우리나라 최대인 1.8m 크기의 치미가 복원 전시되고 있다.

체험학습 과제

1

1-1. 황룡사터에서 발굴된 1.8m의 치미 앞에 서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한옥건축물에서 치미의 위치와 의미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신라미술관에는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사람 키 정도 규모의 금동불입상이 있는데, 불국사 아미타금동불좌상 그리고 불국사 비로자나금동불좌상과 더불어 통일신라 3대 금동불상의 하나이다.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좌상을 찾아 사진을 찍어 보세요.

3

미술관 현관에 전시된 남산 용장계 석조 약사여래좌상은 일제강점기에 절터에서 발견될 때는 머리가 없었습니다. 머리는 따로 아랫마을에서 나중에 박물관으로 들어오게 되어, 1975년 경 제짝을 찾아 목을 결합하게 되었습니다. 머리가 제짝이라는 증거를 찾아 토의하여 기록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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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국립경주박물관<월지관>  

국립경주박물관 월지관은 월지에서 발굴된 유물만을 가지고 전시관을 구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또 박물관에 진열된 물품의 대부분은 황남대총과 같은 무덤에서 발굴된 유물이다. 하지만 이곳에 월지관에 진열된 유물은 신라인들이 실제 생활에서 사용하다가 월지라는 못에 빠뜨렸던 물품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못 뻘 속에서 부식이 일어나지 않고 살아남은 나무로 만든 유물이 많다는 점에서 관심의 대상이다. 우리나라에서 나무 조각에 글씨가 쓰여 있는 목간이 처음으로 출토 확인되었다는 점에서도 주목을 끌 만하다. 또 여러 가지 산양과 같은 짐승의 뼈가 전시되고, 또 오리 등의 날짐승 뼈들도 전시되고 있으므로 월지에는 오늘날 동물원과 같은 역할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고 있기도 하다.

체험학습 과제

1

1-1. 월지에서 발굴되어 보존처리 된 신라 시대의 배 앞에서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월지관의 전시 유물 중 하나를 골라 설명해 보세요.

2

월지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14면체 주사위를 찾아보세요. 사각형 면 여섯 개와 육각형 면 여덟 개로 구성되어있다. 이들 사각형 면과 육각형 면이 나올 확률은 어떻게 될까를 알려면 어떤 요소를 알아야 할지 토론하여 기록하세요.

3

월지에서는 나무 제품들이 썩지 않고 많이 보존되어 발견되었다. 월지관에 전시된 나무 유물 가운데 하나를 골라 어디에 사용된 물건인지 기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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