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코스 : 불국과 동해구

[제6코스]대왕에게 충(忠), 효(孝)를 배우는 길 !!! 불국과 동해구

  • 화랑교육원⇒50 주상절리군[60]⇒15 이견대(대왕암 바닷가)[15]⇒5 감은사지[30]⇒20장항리사지[40]⇒20 불국사[90]⇒10 원성왕릉[30]⇒20 화랑교육원

※ 도보 ~분 / 차량 ⇒분 / 유적지 내 체류 시간 [  ] / 중식 장소 밑줄

지도

답사 개요

  • 신라 왕릉의 표본 - 원성왕릉
  • 불교 건축의 핵심 장소 - 불국사
  • 보기 드문 국보. 뛰어난 조각의 오층탑이 있는 - 장항리사지
  • 신라 호국정신이 깃든 -감은사지
  • 새롭게 등장한 명소 - 양남 주상절리군(자연유적)

유의 사항

  • 도로를 횡단하거나 따라 걷는 경우가 있으므로 교통규칙을 잘 지키고, 안전에 유의하도록 특히 주의합니다.
  • 점심과 물과 간식을 반드시 준비합니다.
  • 풀숲을 통과할 수도 있으므로 운동화에 긴바지를 착용합니다.
  • 유적 유물을 훼손하지 않도록 주의하여 관찰합니다.
  • 의문은 인터넷이나 해설사를 이용하여 해결하도록 합니다.
  • 몸에 문제가 있을 때는 재빨리 인솔교사에게 말씀드려 해결합니다.
  • 발굴현장에서는 책임자의 허락을 받은 후에 관람합니다.

 

1. 경주 양남 주상절리군  

(천연기념물 제536호)

주상절리(柱狀節理)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마그마에서 분출한 1000℃이상의 뜨거운 용암은 상대적으로 차가운 지표면과 접촉하는 하부와 차가운 공기와 접촉하는 상부에서부터 빠르게 냉각된다. 빠르게 냉각하는 용암은 빠르게 수축하게 되어 용암의 표면에는 가뭄에 논바닥이 갈라지듯이 오각형 혹은 육각형 모양의 틈(節理)이 생기게 된다. 이렇게 냉각 수축 작용으로 생긴 틈이 수직한 방향으로 연장되어 발달하면 기둥모양(柱狀)의 틈이 생기데 되는데 이를 주상절리(柱狀節理)라 한다.
신생대 말기에 이 지역에 <수직주상절리>는 물론, 경사지거나 심지어 <누워있는 주상절리>도 형성하였다. 동해의 푸른 바다와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만들어내는 여러 형태의 주상절리들은 신비하고 아름다운 전경뿐 만 아니라 옛날에 있었던 화산활동을 연구하는 중요한 학술적인 자료가 된다.
우리나라의 주상절리하면 제주도 남부해안의 것이 대표적이다. 규모가 크고 범위도 넓으나 주로 수직 주상절리 들이다. 경주 동해의 주상절리는 규모는 작으나 수직과 수평, 그리고 꽃모양 등 다양한 것들이 모여 있어 값지다. 특히 그 형태가 완전한 꽃모양의 <부채꼴 주상절리>가 해안 가까이 절절한 장소에 펼쳐져 있어 멋진 관광 정소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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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천리<부채꼴 주상절리>

주상절리의 방향은 냉각이 진행되는 방향과 일치한다. 뜨거운 용암이 지표로 분출하여 빠르게 냉각될 때 일반적으로 아래로는 지표면, 위로는 공기와 접촉하여 냉각된다. 따라서 대체로 수직 방향으로 절리가 발전하게 되며, 수직 기둥모양의 주상절리가 많이 만들어 진다.
신생대 말기에 이곳에 분출한 현무암질 용암에서 발달한 주상절리는 수직방향보다는 수평으로 누워있는 많은 주상 절리들이 많은데, 그중에서 특별한 지형 구조에 의해 마그마가 부채 살처럼 퍼지면서 식어져 <부채꼴 주상절리>가 만들어 진 것이다. 그 모습이 마치 한 송이 해국이 바다위에 곱게 핀 것처럼 보여 ‘동해의 꽃’이라고도 부른다.
이곳 읍천리 <부채꼴 주상절리>는 국내에서 최초로 발견된 독특한 형태로 세계적으로도 매우 드문 사례이며, 시각적인 아름다움과 함께 그 생성과정에 있어서 학술적인 가치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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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워있는 주상절리

주상절리는 뜨거운 용암이 빠르게 식으면서 만들어지는 구조이다. 특히 <누워있는 주상절리>는 지하의 뜨거운 마그마가 지각의 약한 틈을 따라 지상으로 올라오다가 식거나, 땅위로 분출된 용암이 움푹한 작은 하천이나 땅의 갈라진 틈을 따라 흐르다가 식을 때 만들어 질 수 있다.
동해안 일대는 신생대 말기에 현무암질 용암이 광범위하게 분출했던 지역이다. 이 주상절리는 이러한 현무암질 용암이 냉각되면서 만들어진 다양한 종류의 주상절리들 중의 하나이며 5각 혹은 6각형의 돌기둥들이 수평으로 발달되어 있다. 장작을 가지런히 쌓아 놓은 듯이 누워있는 주상절리는 자연이 만들어낸 독특한 아름다운 모습을 보존하고 있어서 학술 및 자연 유산적인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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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학습 과제

1

1-1. 형태별 모양(부채꼴 모양, 누워 있는모양 등)의 주상절리를 찍어 보세요.

1-2. 경주 양남 주상절리군과 주변 바다와의 어울림에 대한 느낌을 말해보세요.

2

<주상절리(柱狀節理)>라는 단어의 뜻을 풀이해 보세요.

3

누워있는 주상절리의 모양은 어떻게 생겨났는지 말해보세요.

4

<주상절리>의 모양을 어디에서 또 본적이 있는지 말해보세요.

5

바다길 데크 육지 쪽 단면에 동글동글한 자갈돌이 여기에 왜 쌓여 있는지 말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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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경주 이견대  

(사적 제159호)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 제30대 문무왕의 수중릉인 대왕암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위치한 건물이다.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문무왕의 호국정신을 받들어 31 대 왕인 신문왕이 681년에 세웠다. 신문왕은 부왕 문무왕의 은혜를 기리며 감은사를 짓고, 용이 된 부왕이 절에 들어올 수 있도록 구멍을 뚫어 두었다. 그 뒤에 부 왕(용)이 나타나 만났는데 그 자리가 이견대이다. 또 이견대에서 신문왕이 용으로부터 세상을 구하고 평화롭게 할 수 있는 <옥대>와 <만파식적>이라는 피리를 받았다. 이견대라는 이름은 신문왕이 바다에 나타난 용을 보고 나라에 크게 이익이 있었다는 뜻을 포함한 말인데, 『주역』의 ‘비룡재천 이견대인(飛龍在天 利見大人)’이란 문구에서 따와서 지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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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학습 과제

1

1-1. 이견대에서 대왕암(문무왕릉)을 찾아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이견대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문무왕이 유독 동해바다를 지키겠다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3

‘신라의 3가지 보물’(三寶)로 여겨지는 것은 무엇인가요?

4

신문왕이 이곳에서 얻은 대나무로 만들어 후에 많은 기적을 일으켜 세상을 구하고 평화롭게 할 수 있다는 피리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5

문무왕릉과 이견대, 감은사지에 얽힌 호국정신과 효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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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경주 감은사지  

(사적 제31호)

<감은사지>가 위치하는 이곳은 예로부터 동해구(東海口)로 불리던 곳으로, 동쪽에는 문무대왕의 무덤 대왕암이 있고, 앞으로는 토함산에서 발원하여 바다로 흘러드는 대종천(大鐘川)이 있다.

<감은사>에 얽힌 이야기

신라는 당나라와 손을 잡고 백제와 고구려를 통합한 다음 당나라 세력까지 물리친 신라 30대 문무왕에게 남은 문제는 바다를 건너오는 왜구였다. 대규모 군대는 아니지만 시시때때로 쳐들어와 사람과 물자를 약탈해 가는 왜구는 매우 성가시고 귀찮은 존재였다. 이에 문무왕은 부처의 힘을 빌려 왜구를 막겠다는 생각에서 동해 바닷가에 절을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절을 완공하기 전에 위독하게 되자 문무왕은 승려 지의(智義)에게 "죽은 후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지킬 것"을 유언하였다. 이에 따라 화장한 뒤 동해에 안장하였으며 뒤를 이어 즉위한 아들 신문왕이 부왕의 뜻을 받들어 짓다가 중단한 절을 즉위한 이듬해인 682년에 완성시켰다. 그리고 죽은 뒤까지도 나라를 생각하는 문무왕의 은혜에 감사하는 뜻에서 절의 이름을 감은사(感恩寺)라고 하였다.
문무왕 때 짓기 시작한 감은사의 원래 이름은 진국사(鎭國寺)라 불렀다고 하는데, 진국(鎭國)은 진호국가(鎭護國家)의 준말이며, 또한 왜구를 물리치려는 의미인「욕진왜병(欲鎭倭兵)」의 뜻과도 서로 잘 맞는다. 감은사(感恩寺)로 절 이름을 고친 것은 대왕의 별세 후 앞바다에 장사지냈기에 대왕의 은혜를 감축하기 위함이었다고 추정된다.
그러던 어느 날 밤에 신문왕의 꿈에 문무왕이 나타났다. 문무왕은 아들 신문왕에게 "내가 하늘로 승천하게 되니, 네가 바닷가로 와서 나의 승천을 지켜보라" 했다. 그래서 신문왕은 아버지 문무왕이 용이 되어 승천하는 것을 지켜보기 위해 이견대(利見臺)를 지었다.

<감은사>의 가람배치(구조)

감은사지는 1959년~1960년, 1979년∼1980년의 발굴 조사 결과, 중문ㆍ금당ㆍ강당을 남북일직선상에 놓고 금당 전면 좌우에 삼층석탑을 배치한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쌍탑 가람배치로 밝혀졌고 창건 이후 두 차례에 걸친 가람 변천 과정이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가람의 규모는 동ㆍ서 회랑간의 중심거리가 약 70m이고, 중문터에서 강당터까지의 중심거리가 63.7m로서 가람의 외곽선은 거의 정방형에 가깝다. 초석은 금당터의 것은 확실하지 않지만 거의가 방형이며 이 시대의 전형적인 원형 쇠시리를 한 주좌가 있는 초석이다.
감은사지는 종래의 평지가람에서 구릉지 가람으로, 고신라의 일탑 중심의 가람배치에서 쌍탑 일금당(雙塔一金堂) 양식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보이는 초기의 것이다. 즉 동서로 두 탑을 세우고 이 두 석탑 사이의 중심을 지나는 남북선상에 중문과 금당(본존불을 모신 곳), 강당(설법을 하던 곳)을 세운 형태이다. 중문은 석탑의 남쪽에, 금당과 강당은 석탑의 북쪽에 위치한다.

여기서 잠깐! - 신라의 가람 배치(구조)에 대해

불교가 삼국에 전래된 이래 사찰의 구조는 처음에는 1탑 3금당식 이었다. 중앙에 목탑을 세우고 3개의 금당을 세우는 형태였는데 고구려의 1탑 3금당식 구조는 중앙의 목탑을 3개의 금당이 品자 형식으로 에워싼 형태로 모든 금당의 정면은 탑을 바라보는 형상이었다. 신라의 불교는 고구려를 통해 전래되었는데 이때 1탑 3금당식의 가람양식도 함께 전해졌지만 신라에서는 3개의 금당 정면이 모두 탑을 에워싸고 바라보는 형식이 아닌 한쪽 방향을 바라보는 형식이었다. 황룡사의 경우도 3개의 금당이 일렬로 늘어서 남쪽을 바라다보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후 삼국통일기에는 비록 목탑이지만 사천왕사와 망덕사에서 처음 쌍탑이 나타나고 다시 감은사에서는 이 쌍탑이 석탑으로 나타나 통일신라기의 쌍탑 일금당 양식이 정착되었다.

감은사의 독특한 <금당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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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문과 탑에서 북쪽 정면에 있는 것이 금 당이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를 가지 고 있다. 금당 초석 아래 바닥으로부터 석재 들이 일정한 높이를 두고 지하공간을 만들고 있는데 이것은 문무왕의 ‘해룡(海龍)’에 대한 전설과 많은 상관관계가 있을 것이라 추정된 다. 기단은 통일신라시대에 즐겨 사용된 가 구식 기단으로 2중으로 되어 있다. 기단의 사면 가운데에는 돌계단을 하나씩 만들어 놓았다. 금당의 기단 바깥쪽에는 폭 5.9척 내외의 범위에 걸쳐 무늬가 없는 전을 깔았다. 금당지의 크기는 가로 15.5m, 세로 9m이고 면적은 약 42평이다.

 

금당의 바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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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당의 바닥 장치는 이중의 방형대석 위에 장대석을 걸쳐놓고 그 위에 큰 장대석을 직각으로 마치 마루를 깔듯이 깔고 그 위에 초석을 놓게 한 것이다. 그리하여 장대석 밑은 빈 공간이 되도록 특수하게 만들었다. 한편 이 공간과 기단과의 사이에는 적당히 다듬은 넙적한 돌을 세워서 흙이 안쪽으로 흘러 들어오는 것을 막고 있다. 이 환기시설은 지하공간에서부터 그 위에 다시 넙적한 돌을 덮은 지하통로를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동쪽 통로는『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용이 출입하는 용혈(龍穴)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금당 아래의 지하구조는 우리나라 가람 가운데 <익산 미륵사지>와 <감은사지> 딱 두 곳에만 발견된다.

 

금당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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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당의 경우 특이한 또 하나는, 돌로 석축을 쌓는 일반적인 양식과는 달리 돌로 판석을 다듬어 세웠다는 점이다. 이러한 건축기법 또한 미륵사와 감은사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라 한다. 금당터 앞의 석재 중에 태극무늬와 기하학적인 무늬가 새겨진 것이 눈에 띄는데 언뜻 보기에도 예삿돌은 아니다.

용(龍)이 드나들던 -<용담, 용혈>

중문의 남쪽은 매우 낮아 석축으로 쌓았는데, 대단히 정교하게 쌓았으며, 특히 못 모양의 부재(돌못)를 이용하고 있는 점에서 볼 때 단순히 가람의 남쪽 끝을 막는 기능만을 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 석축의 바깥으로는 대종천의 물이 지금보다 많았다면 배를 타고 이 절에 이르는 통로의 구실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이 석축의 바깥으로는 현재 못이 하나 남아 있다. 이를 <용담>이라 부르는 데, 신라 당시 감은사가 대종천변에 세워졌고 또 동해의 용이 드나들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이 못이 대종천과 연결되었을 것이다. 또한 동해안은 융기해안이므로 신라시대에는 바닷물의 수위가 지금보다 높았을 것이므로 충분히 용담 연못의 물과 대종천 그리고 바닷물이 연결되었을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감은사지 삼층석탑사>에 대해

- 국보 제112호. 전체 높이 13.4m

 

[그림]감은사지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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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터의 금당 앞 좌우에 서 있는 2기의 탑은 동서의 쌍탑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동서 두 탑은 전체적인 형식과 구조는 말할 것도 없고 각 부재의 치수까지도 같다. 다만 상하층 기 단 부재모양에 있어서 약간 차이가 있을 뿐이 다. 화강암 이중기단 위에 응회암질의 방형 중층 탑신을 올린 삼층석탑으로 규모면에서 신라 최대의 석탑이다. 기단부와 탑신부가 거의 완전하게 남아있고 상륜부 노반 위는 결실되어 없어진지 오래이지만 찰주가 남아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감은사는 682년(신문왕 2)에 창건되었는데, 이 탑의 건립연대도 역시 같은 시기로 추정된다.

하층기단의 지대석과 면석이 같은 돌로 된 12장의 석재로 구성되어 있고, 각 면에는 양쪽 우주(모서리 기둥)가 있는 외에 탱주(버팀기둥)가 3주씩 있다. 갑석도 역시 12장의 석재로 짜여 있으며 갑석 중앙에는 호형(弧形)과 각형(角形)의 2단 굄이 있다. 상층기단은 면석이 12장의 석재로 조립되어 있으며 갑석은 8매로 구성하였다. 각 면에는 양쪽 우주가 있는 외에 탱주가 2주씩 있다.

탑신부의 옥신(몸돌)과 옥개석(지붕돌)은 각 부마다 4∼8개의 석재로 구성되어 있고, 그 내부에는 적심석으로 메워져 있으나, 제3층 옥신만은 석재가 하나인데 이것은 규격이 작은 원인도 있겠으나 사리장치를 하기 위한 방편으로도 볼 수 있다. 초층 옥신은 네 모서리의 우주와 그 사이의 면석들을 따로 만들어 맞추어 세웠으며, 제2층 옥신은 각각 한쪽에 우주를 하나씩 모각한 판석 4장으로 조립되어 있고, 1장으로 조성된 제3층 옥신에는 각 양쪽의 우주가 정연하다. 옥개석은 낙수면(지붕돌 윗면)) 부분과 받침 부분을 별개의 돌로 조성하되 각각 4장으로 짜여 있다. 옥개받침(지붕돌 아랫면)은 각 층 5단씩이며, 낙수면 정상에는 2단의 높직한 굄이 있으며 낙수면 끝은 약간 위로 들려져 있다.

 

[그림]석탑의 세부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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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륜부는 제3층 옥개석 위에 1장으로 만들어진 노반석이 남아 있고, 그 이상의 부재는 없어졌다. 현재는 약 3.9m 높이의 쇠로 된 찰주가 노반석을 관통하여 탑신부에 꽂혀 있을 뿐이다. 노반 이상에 보이는 찰주의 중간부분에 가공한 흔적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상륜부는 모두 석재 구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이 석탑은 상하기단과 탑신부에 꽂혀 있을 뿐이다. 노반 이상에 보이는 찰주의 높이가 3.5m, 그 이하로 제3층 옥개석의 중심에 꽂힌 부분이 약 1.3m이다. 이 찰주의 중간부분에 가공한 흔적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상륜부는 모두 석재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그림]감은사지 삼층석탑 체감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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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사지 석탑은 상하기단과 탑신부의 각 면에 우주와 탱주가 모각되어 있고 낙수면이 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전각에서 추녀가 위로 들려지는 등 목조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수평을 이루고 있는 추녀 밑 부분과 층단을 이루고 있는 받침 등의 석탑양식은 이후 우리나라 석탑의 전형 모델로 정립되었다. 즉 감은사 탑은 고선사의 삼층석탑 등과 함께 이후 우리나라 석탑의 정형을 이끈 탑이라 할 수 있다.
탑의 완성도를 결정하는 것은 안정감과 상승감이라는 두 가지 요소인데, 이 두 요소는 서로 상충된다. 고구려, 백제의 탑처럼 5층, 9층으로 세우면 상승감은 해결되지만 신라 석탑의 전형은 3층이므로 상승감에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신라 석탑은 1층 탑신(몸돌)을 높게 하고 층수에 포함되지 않는 2중 기단을 세워 상승감과 안정감을 동시에 해결하였다. 신라인의 뛰어난 창의력이라 할 수 있다.
감은사지 삼층석탑은 바로 이 두 가지 측면에서도 성공을 거두고 있다. 즉 3개의 몸돌이 4:3:2의 비례로 상승감에 성공하고 있는데, 실제 높이는 4:3:2가 아닌 4:2:2 이다. 곧 1층 몸돌이 2, 3층에 비해 월등히 높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의 눈높이에서 보는 착시를 감안한 것으로 만약 정상적인 체감률을 따랐다면 지금과 같은 상승감을 보지 못하였을 것이다.

<감은사지 西삼층석탑> 내 유물

(보물 제3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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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12월 31일 서쪽에 있는 석탑을 해체ㆍ수리하다가 3층 탑신에서 발견한 사리장엄구(사리갖춤) 등을 사진으로 감상해 보자. 이들 관계 유물들은 조성연대와 발견 장소가 확실한 몇 안 되는 유물중의 하나이다

[그림]감은사지 유물

<감은사지 삼층석탑>東삼층석탑 내 사리장엄구

7세기 신라 도금기술과 공예기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금동사리함 등 자료들을 사진으로 감상해 보자.

 

[그림]감은사지 동탑 금동사리외함(좌)과 금동사리내함(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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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수정 사리함과 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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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사지 동탑 출토 사천왕상과 스님상, 사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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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학습 과제

1

1-1. 동, 서 탑이 함께 보일 수 있는 위치 에서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감은사지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탑 꼭대기에 솟아 있는 검은 침의 명칭과 사용된 재료가 무엇이며 어떤 용도인지 설명해 보세요.

3

이 탑이 삼층석탑인 것을 탑의 구조와 함께 설명해 보세요.

4

탑의 부분 명칭들을 말해 보세요.

5

지붕돌조차 여러 개의 돌 조각으로 맞추어 제작한 이유를 생각해 보세요.

기수 문제번호 등록일

 

 

4. 경주 장항리사지  

(사적 제45호)

석굴암이 있는 토함산에서 대왕암이 있는 동해를 바라보며 동쪽으로 내려온 산줄기에 대종천의 상류를 끼고 낮은 대지가 있는데, 놀라운 절터가 하나 있다. 절 이름도 전하지 않아 지명을 따서 <장항리 절터>라 하고 장항사(獐項寺), 혹은 탑정사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확실한 이름은 알 수 없다.

쌍탑 1금당의 전형적인 통일 신라 사찰 형태를 갖추고 있다. 가람 배치의 특징은 금당을 사 이에 두고 앞쪽에 두 탑이 있지 않고, 탑과 금당이 거의 같은 선상에 나란히 늘어서 있다는 것이다. 이는 양식상의 특징이 아니라 절터가 넓지 않았기 때 문이다.
원래 금당터를 중심으로 양쪽에 석탑이 있었을 것이나 현재 금당터 오른 쪽으로 두 탑이 나란히 서 있는 것은 1923년 사리를 탐낸 도괴범의 소행 때문이다. 도괴범에 의해 탑이 폭파된 후 그 잔재가 대종천에 방치되었다가 1966년에 수습되어 현재의 자리에 놓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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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항리사지 西 오층석탑>

- 국보 제236호. 높이 9.1m

1920년대 도굴범이 폭약을 터뜨려 서탑과 동탑이 무너진 상태였다가 1932년 서탑은 복원되었다.
서 오층석탑은 금당터에서 서쪽 으로 15m 내외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이층 기단 위에 5층 탑신부를 건립하고 상륜부를 형성하였다.돌 색깔이 부드러운 살색에 가까워따뜻한 느낌을 준다. 상하 이중의기단부는 널찍하여 안정감이 있다.하층 기단은 양쪽 우주에 탱주 2개를 조각하였고, 갑석 상면에 높직한 원호와 얕은 괴임을 마련하여상층 기단을 받치고 있다. 상층 기단 면석에도 우주와 탱주가 각기 둘씩 조각되었다. 갑석은 아래쪽의 부연이 정연한데 상면에 높직한 괴임 2단을 마련하여 탑신부를 받치고 있다.

 

<토함산 동록에 있는 장항리 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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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몸돌에는 4면에 도깨비 형태의 쇠고리가 장식된 두 짝씩의 문을 조각했고 그 좌우에 연꽃 모양의 대좌위에 서있는 인왕상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그 조각의 우수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 하나씩으로 조성되었다. 1층 몸돌과 2층 이상의 몸돌의 체감률은 심한 편이나 2층 이상에서는 거의 없을 정도이다.
1층 몸돌 양 우주 가운데는 도깨비(鬼面) 형태의 쇠고리가 장식된 두 짝씩의 문 모양 조각이 있고, 그 좌우에 인왕상이 조각되었다. 벗은 상체에 무릎 위까지 오는 짧은 군의를 입은 인왕상은 어깨가 떡 벌어지고 몸을 버티고 있는 두 다리의 근육은 당당하면서도 활기찬 형태를 취하고 있다. 부라린 눈과 큼직한 코, 듬직한 입, 강인한 턱과 불거진 광대뼈 등 조각이 매우 빼어난 인왕상이다. 이러한 형식은 분황사 모전석탑의 감실과 좌우 인왕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측이 된다.
지붕돌 층급받침은 각층 5단씩이고 낙수면 꼭대기의 몸돌 괴임대는 각형 2단이 정연하다. 낙수면은 평박하고 네 귀퉁이의 추켜올림(轉角)이 뚜렷하여 경쾌하다.
4귀의 추녀 끝에는 풍경을 달았던 작은 구멍이 있다. 상륜부는 노반석만 남아 있다. 각 부의 비례가 아름답고 조각의 수법도 우수하다.

 

[그림]장항리 서오층석탑 체감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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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의 1층 몸돌 각 면에 한 쌍의 인왕상을 정교하게 조각해 놓은 것이 특이한데, 이러한 현상은 8세기 전반기에 처음 나타나는 것으로 이 탑의 독특한 특징이 되고 있다. 이 석탑 이후로 신라 석탑에 인왕상, 사천왕상 그리고 십이지신상 나타나기 시작한다.
7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감은사지 삼층석탑과 비교해 볼 때, 감은사지 삼층석탑이 각 부분 모두 여러 개의 석재로 이루어진 것과 달리 이 석탑은 몸돌과 지붕돌들이 각각 한 몸으로 되어 있어 8세기 중엽 이후 오층석탑의 전형으로 옮겨지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즉 삼층석탑이 주류를 이루고 있던 신라 석탑 양식에서 삼국통일과 함께 백제에서 유행하던 오층석탑이 문화적으로 유입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서탑이 비교적 제 모습을 갖추고 있는 반면에 동탑의 기단부는 완전히 없어지고 탑신부는 몸돌의 1층만이 남아 있는데, 그 위에 5층까지의 지붕돌만을 쌓아 놓았다. 비록 심하게 파괴되었지만 신라의 문고리가 선명하게 새겨져 당시 대문 등을 연구 복원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를 재공해 주고 있다. 동오층석탑은 파괴된 채 한곳에 모여져 있었는데 언제가 폭우로 절터 축대가 무너져 아래 계곡으로 탑재들이 쓸려 내려갔던 것을 1966년 2월에 수습하여 현재의 자리에 모아놓은 것이다.
서 오층석탑의 인왕상은 무장을 한 형태이지만 동 오층석탑의 인왕상은 평복을 한 형태를 띠고 있다.

해설 - 빼어난 솜씨의 <인왕상> 조각(仁王像)

사찰이나 불전의 문 또는 불상 등을 지키는 불교의 수호신으로 흔히 금강역사, 이왕(二王), 이천왕, 집금강신(執金剛神) 등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것은 인왕이 인도에서 문을 지키는 신(약사신 등)을 불교에서 수용하여 인왕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사찰이나 불상, 불사리를 지키는 수문장으로 사찰의 문이나 불전의 입구, 불상의 좌우, 탑의 문 등에 조각이나 그림으로 흔히 등장하고 있다. 현존하는 가장 이른 인왕상은 신라 선덕여왕 때 조성된 분황사 모전석탑 사방문의 인왕상이며, 그 절정의 조각은 석굴암의 인왕상이라 하겠다.
이곳 인왕상의 형태는 권법자세, 무기를 든 자세, 또는 무기를 든 자세와 권법자세를 동시에 취하고 있는 상 등으로 나눌 수 있는데, 공통적인 특징은 얼굴은 분노형이며, 상체는 나체형으로 나타낸 점이다.
특히 우리나라 조각에는 희귀한 편인 근육표현이 적나라하게 묘사된 나신상이라는 점에서 인왕상의 미술사적 의의는 매우 높으며, 인도 재래신의 불교화라는 점에서 종교적인 관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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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당터 불상대좌>

금당터의 기단 규모는 동서 15.8m, 남북 12.7m로 평면 약 200㎡이며, 기단의 전면 중앙에는 계단의 지대석이 남아 있다. 금당터에 남아있는 초석을 볼 때 정면과 측면이 각각 3칸씩인 그다지 크지 않은 규모의 금당이었음을 알 수 있다. 초석은 한 변 약 75㎝인 방형대석(方形臺石) 윗면에 중원형주좌(重圓形柱座)가 있으며 거의 모두가 남아 있다.
금당터에 불상은 없고 불대좌만 남아 있는데 특이한 것은 그 불상이 좌불이 아니라 입불이라는 점이다.

석조 불대대좌는 상하 각기 다른 돌로 만들어졌는데, 하부는 측면의 안상 속에 신장(神將)과 신수(神獸)를 조각한 팔각형으로 되어 있고, 상부는 연꽃을 조각한 원형연화대좌이다. 크기는 하부 높이 0.6m, 최대 폭 2.4m이며, 상부는 높이 0.53m, 지름 1.84m이다.
불상대좌 한 면에 익살스럽게 사지를 뻗은 사자 조각상이 유명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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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항리 절터 석불입상>

석불대좌 위에 있던 입불상은 두 팔이 잘리고 허리 윗부분과 광배만 남은 채로 있었는데 1932년 서탑을 복원하면서 조선총독부 박물관 경주분관으로 옮겨졌으며, 현재 국립경주박물관 북쪽 정원에 전시되어 있다. 현재 남아 있는 높이는 3m인데 상반부 파편으로 미루어 4m가 넘는 대불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머리와 얼굴, 그리고 광배에 조각된 화불 등의 우수한 조각수법으로 미루어 통일신라 8세기 중엽 사실적 조각양식을 잘 보여주는 여래입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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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학습 과제

2

1-1. 석물과 석물 사이가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어떤 장치(-은장)를 하였는지현장에서 그 근거를 찾아 촬영해보세요.

1-2. 장항리사지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동,서 탑을 비교해 보고 무엇이 서로 다른지 말해보세요.

3

금당 자리에 있는 불상대좌에, 좌상이 아닌 입불상(서있는 불상)을 세웠다는 근거를 제시해 보세요.

4

탑에 있는 인왕상과 門 조각은 어떤 의미에서 조성되었는지 말해보자.

5

불상대좌 <사자상>의 얼굴 표정과 팔과 다리의 자세가 어떤지 설명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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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경주 원성왕릉  

(사적 제26호)

신라 제38대 원성왕(재위 785~798년)의 능으로 불국사역에서 울산방면으로 약 1.5㎞ 지점에 있다. 얼마 전까지 괘릉(掛陵)이라고 불리고 간판을 세웠는데, 왕릉을 조성할 때 연못처럼 물이 많아 유해를 수면 상에 걸어(掛) 안장했다는 속설에 따른 것이다.([동경잡기]능묘조), 여기가 <원성왕>의 능으로 밝혀졌으므로 정식 명칭과 간판을 <원성왕릉>하였다.

원성왕의 즉위 과정

원성왕(김경신)은 혜공왕을 죽이고 왕이 된 37대 선덕왕[宣德王, 良相-내물왕 10대손]을 도운 공으로 상대등이 되었다가 그 뒤 선덕왕(宣德王)이 후사 없이 죽자 왕에 등극하게 되는데, 무열왕의 6세손인 김주원(金周元)과의 왕위다툼에서 승리하여 왕이 된다.
무열왕으로 부터 시작된 무열왕의 후손에 의한 왕위계승(무열왕계)이 8대 130년 동안 이어오다가 사실상 혜공왕 대에 끊어지게 되고 원성왕(김경신-내물왕의 12대손)이 왕위에 오른다. 이후부터 56대 경순왕까지를 신라 하대로 구분하고 있는데, 이 시기는 왕위 쟁탈전이 극심하여 정치 사회적으로 매우 혼란한 시기이다. 150년 사이에 20명의 왕이 즉위하게 된다.
그는 즉위 후 관리등용을 통한 개혁을 위해 788년에 유교 경전에 능통한 사람을 3품으로 나누어 관리로 등용하는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제도를 시행하였다.

이 능이 <원성왕릉>이라고 어떻게 밝혀졌는가?

<삼국사기>에서는 원성왕이 재위 14년 만에 죽으니 유해를 봉덕사 남쪽에서 화장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삼국유사>에는 원성왕릉이 토함산 서쪽 곡사(鵠寺)에 있으며 鵠寺는 숭복사(崇福寺)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숭복사에는 최치원이 쓴 사산비명(四山碑銘)중의 하나인 <대숭복사비>가 남아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 괘릉에는 능비가 보이지 않으나 인근(외동읍 말방리)에 숭복사터가 있어 괘릉이 원성왕의 능이라는 견해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숭복사터에는 지금 석탑 2기가 남아있는데 이곳에서 최치원이 쓴 <숭복사비>의 파편이 발견되어 삼국유사의 기록이 사실임이 드러나고 아울러 괘릉의 주인공이 확인되게 된 것이다.
김씨 문중에서는 괘릉이 문무왕릉이라고 비정하여 혼유석 동편에 문무왕릉이라는 단비(短碑)를 세웠었다. 이 비석은 1967년에 대왕암이 문무왕릉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1973년 경 이후에야 비를 제거하고 원성왕릉으로 수정한 것이다.

<원성왕릉>의 구조 관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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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성왕릉은 신라의 왕릉 중에서 뛰어난 조각의 대표적인 능이다. 원형봉토분으로서 높이는 6 m 지름은 23 m로 봉분 아래에는 봉토를 보호하기 위한 호석(護石)이 설치되어 있다.
호석은 목조건축의 석조기단과 같이 지대석 위에 높이 95cm 길이 120cm크기의 판석으로 된 면석(面石)을 놓고 그 위에 갑석을 올렸다. 각 면석 사이에는 봉분 내부로 뿌리가 길게 뻗어 면석과 봉토가 붕괴 되지 않도록 지탱해 주는 탱석(撑石)을 배치하였는데, 탱석은 면석보다 약간 앞으로 내밀어 쐐기돌의 역할을 하고 있다.

 

괘릉의 正南 십이지-말(馬)-불꽃 방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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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탱석에는 두 칸 건너 하나씩 무복을 입고 무기를 잡고 있는 십이지신상을 조각하였으며 조각수법은 신라 십이지신상 가운데 우수한 것이다. 왕릉 둘레 바닥에는 배수를 고려하여 부채꼴의 판석(板石)을 바깥으로 경사지게 깔았으며, 둘레에는 높이가 1.7 m되는 25개의 석주(石柱)를 세우고 돌난간을 설치하였다. 현재 돌기둥은 모두 남아 있으나 돌기둥 사이사이에 끼웠던 난간 살대는 거의 없어져 근년에 만들어 세웠다. 봉분 바로 앞에는 동쪽으로 약간 치우쳐 사각형의 혼유석(魂遊石)이 놓여 져 있다. 봉분의 중심에서 남쪽으로 약 80 m로 떨어진 위치로부터 시작하여 동서로 약 25 m를 사이에 두고 북쪽으로부터 돌사자 두 쌍, 관검석인(冠劍石人) 1쌍, 서역인(西域人)모습의 석인(石人) 1쌍, 8각의 화표석(華表石) 등이 마주 보고 있다.
이 석조물들의 조각 수법은 매우 당당하고 치밀하여 이와 같은 유형의 신라 조각품 가운데는 가장 우수한 것으로 손꼽히고 있다.

 

두 석인상(石人像)의 정체?

석인상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많은 이 설이 제기되어 있고 현재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먼저 능 입구에 들어서면 신도(神道)임을 알리는 화표석이 서 있고 다음에는 서역인의 모습을 한 석인상이 머리 부분에는 중앙아시아식 터번을 착용하고, 오른팔을 위로하여 주먹을 움켜잡고 있으며 1m가량의 몽둥이를 왼손으로 짚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키가 2.4m나 되는 이 거대한 석인은 얼굴모양이 분명히 우리와 같은 모습이 아니다.
이 석인은 무사의 복장인 갑옷을 입지 않고 아무런 장식이 없는 부드러운 느낌의 옷을 입고 있다. 이 주인공에 대해서는 페르시아인, 아리안인, 이란인, 오만인, 위구르인 등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석상 뒷모습에는 직경 10㎝ 정도의 주머니를 차고 있는 것이 보이는데, 우리나라 고유의 복주머니 같기도 하나 사실은 산낭(算囊)이라는 것으로 호인(胡人-중국 측 표현)들이 당나라 장안성에 거주하면서 주머니에 계산하는 기계, 즉, 주판(珠板) 같은 것을 주머니에 넣어 다닌 데서 유래된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그 다음으로 서 있는 석인상은 지금까지 문인석(文人石) 또는 신라인(新羅人)으로 불러왔으나 관찰해 보면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석인상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전면은 문복(文服)을 착용하고 있는데 옷 속에 칼을 양손으로 움켜잡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옷자락 끝에는 칼이 선명하게 조각되어 있다. 그 뿐만 아니라 등의 옷을 보면 분명 무사의 복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얼굴 모습도 우리와 달라 외래인의 모습으로 보아야 한다.
또한 중요한 점은, 우리가 보통으로 나라의 대신들을 구분할 때 문신(文臣), 무신(武臣)으로 불러왔는데, 이러한 문무(文武)의 구별은 실제 고려시대부터 생기였고 신라시대는 문관과 무관의 구별이 없었음을 알아야 한다.
왕릉의 완비된 모습은 왕위계승 관계가 부자상속 또는 형제상속 등 가장 안정적인 정치 상황일 경우에 나타나게 된다. 사실로 원성왕 이후의 왕들은 원성왕의 직계후손들이 9대에 걸쳐 왕위를 계속 이어 받고 있다. 즉 원성왕의 손자 3인, 증손자 5인이 계속 왕위를 이어가게 되는데, 후손의 왕이 선왕의 무덤을 화려하게 꾸민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서역인 얼굴의 무인상(보물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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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 주변을 장식한 우수한 조각의 <2지상>

신라 왕릉의 변천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호석의 변화와 12상의 배치라고 할 수 있다. 호석(護石)이란 무덤의 봉분 흙이 흘러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무덤 가장자리에 설치하는 돌이다. 초기에는 큰 자연 돌을 무덤 둘레에 박았다(무열왕릉의 경우). 이 자연 돌 호석은 봉분이 깍기면 흙 밖으로 드러나 육안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 호석의 한 변화가 <신문왕릉>에서 보이는데, 벽돌을 몇 겹으로 쌓아 호석으로 삼고 그 벽돌 호석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사다리 같은 받침돌을 세운 것이다. <성덕왕릉>에서는 벽돌형 호석이 판석형 호석으로 바뀌는데, 사다리 같은 받침돌을 세운 것은 신문왕릉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괘릉>에서는 사다리 같은 받침돌이 사라지고 그 판돌(탱석)에 12지상 조각이 돋을새김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즉, 십이지 상을 입체로 따로 조각하여 배치하였던 성덕왕릉의 형식에서 탱석에 직접 조각하는 형식으로 한층 더 발전시킨 것이다.
십이지상과 석사자 등을 배치하는 것은 신라인의 창안(創案)이며, 각종 석조물에서 보여주는 뛰어난 조각수법은 당시 신라인의 고도로 발달한 예술적 경지를 보여주는 한 예라 할 수 있다.

체험학습 과제

1

1-1. <12지상> 중에서 자기에게 해당되는 동물 앞에서 자기 얼굴과 함께 찍어 보세요.

1-2. 원성왕릉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능 앞에 배열된 장식물의 명칭 중 ( )에 들어갈 말을 써 보세요.(남쪽부터)

 

- 팔각 모양의 기둥 : ( )

- 2쌍의 석인

: (관검석인, 서역인 각 1쌍)

- 2쌍, 4마리의 (돌사자상)

- 왕릉 앞에 있는 사각형태의 돌

: ( 석)

3

4인의 石人이 어떤 점에서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지 설명해 보세요.

4

석인(石人)상 뒷부분에 있는 직경 10cm정도의 복주머니 모양의 이름과 추정되는 용도를 말해보세요.

5

무덤의 호석(판석)이 넘어지지 않도록 어떤 장치를 하였을지 설명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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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경주 불국사  

(사적 제502호)

751년(경덕왕 10)에 김대성(金大城)의 발원으로 창건하였다. 그러나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 의하면, “이차돈이 순교한 이듬해인 528년에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迎帝夫人)과 기윤부인(己尹夫人)이 이 절을 창건하고 비구니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574년에는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부인(只召夫人)이 이 절을 중창하고 승려들을 득도하게 하였으며, 왕의 부인은 비구니가 된 뒤 이 절에 비로자나불상과 아미타불상을 봉안하였다”고 한다. 이들 기록에는 신라 불교의 역사를 통해서 볼 때 많은 모순이 있으므로 당시의 불국사가 대규모는 아니었지만, 대웅전과 무설전을 갖춘 사찰이었을 가능성은 엿볼 수 있다.
불국사가 대찰이 된 것은 김대성에 의해서였다. 『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현세의 부모를 위해서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절은 751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774년(혜공왕 10) 12월에 그가 생애를 마칠 때까지 완공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 뒤 국가에서 완성시켰다.
따라서 이 절은 김대성 개인의 원찰(願刹)이라기보다는 ‘국가의 원찰로 건립되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준공 당시 이 절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일곽 등 5개의 구역으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대웅전, 극락전, 비로전, 관음전, 지장전 등을 중심으로 한 구역이다.
김대성이 중창한 뒤 이 절은 9차례의 중창 및 중수를 거쳐 임진왜란에 까지 이른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불국사가 불타게 되자 난을 피하여 장수사(長壽寺)에 있었던 담화(曇華)가 문도를 이끌고 불국사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이미 모두 불타버린 뒤였고, 금동불상과 옥으로 만든 물건과 돌다리와 탑만이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때 타버린 목조건물들은 20년이 지난 뒤부터 점차 복구되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일곽의 경우, 해안(海眼)이 1612년 경루와 범종각과 남행랑 등을 복구하였고, 1630년에는 태호(泰湖)가 자하문을 중수하였으며, 1648년에는 해정(海淨)이 무설전을 복구하였다. 대웅전은 1659년 천심(天心)이 경주부윤의 시주를 얻어 중건하였다. 이 밖에 안양문·극락전·비로전·관음전·나한전·시왕전·조사전만이 이때 중건되었을 뿐 나머지는 복원되지 못하였다. 그 뒤 또다시 퇴락되어 가던 이 절은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의 발원으로 나라에서 중창하였다. 이때의 대복원공사를 위하여 1969년에는 문화재위원들의 발굴조사가 진행되었고, 1970년 2월에 공사를 착공하여 준공하였다. 당시까지 유지로만 남아 있던 무설전·관음전·비로전·경루·회랑 등은 이때 복원되었고, 대웅전·극락전·범영루·자하문 등을 새롭게 단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체험학습 과제

1

1-1. 청운교 백운교 앞에서 이중아치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불국사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연화교는 일반적인 단순한 다리가 아니다. 연화교에는 계단 한 단 한 단 마다에 연꽃봉오리를 조각해 두었습니다. 이를 확인하고 다리 앞에서 사진을 찍어

3

청운교의 이중아치는 어떤 역할을 하였을까를 토론하여 기록하세요.

4

불국사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훌륭하고 화려한 연꽃석조가 있습니다. 이 석조가 화려하다고 한 근거는 무엇인지 관찰하고 기록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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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석가탑>  

(국보 제21호)

불국사 대웅전 앞뜰에 동서로 마주서 있는 석탑 가운데 서탑으로, 국보 제21호이다. 석가탑 또는 무영탑(無影塔)이라고도 하는데, 석가탑이란 이름은 동탑인 다보탑에 대칭되는 호칭이다. 이러한 호칭은 『법화경』에 이른바 다보여래와 석가여래가 나란히 앉아 하나는 설법하고 하나는 증명하는 데서 연유한 것이라 한다. 따라서 다보탑은 다보여래상주증명(多寶如來常住證明)의 탑이요, 석가탑은 곧 석가여래상주설법(釋迦如來常住說法)의 탑이다.
그러나 이 탑에서 나온 「불국사무구정광탑중수기(佛國寺無垢淨光塔重修記)」는 1024년에 불국사 무구정광탑을 중수하면서 남긴 기록인데, 1038년에 다시 옮겨 적은 것이다. 이 탑(혹은 다보탑)을 무구정광탑으로 지칭하고 있어 고려시대에는 불국사의 두 탑이 석가탑이나 다보탑으로 불리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동안 『불국사고금역대기』에 의해서 석가탑 창건을 751년으로 보았으나, 묵서지편에서 나온 두 종류의 중수기 기록으로 다보탑과 석가탑 모두 대성각간(大城角干)의 주도하에 불국사 쌍탑으로 신라 경덕왕 원년(742)에 창건되었음을 밝혀주고 있다.

그림

 

체험학습 과제

1

1-1. 석가탑 앞에서 다보탑이 함께 나오도록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석가탑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석가탑의 사리장엄구는 몇 층에 있었는가를 찾아 기록하세요.

3

석가탑에서 발견된 인류 최초의 목판인쇄물은 무엇인가 명칭을 기록하고, 석가탑에서 이 유물이 발견된 의의를 토론하고 기록하세요.

4

석가탑을 일명 무영탑이라고 합니다. 무영탑의 의미와 그런 다른 이름을 가지게 된 연유를 알아보고, 토론하여 기록하세요.

5

석가탑 둘레에 있는 연꽃대좌 여덟 개의 조각을 형식을 비교하여 몇 가지인지, 이들은 왜 설치했을까를 토론하고 기록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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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경주 불국사 다보탑  

(국보 제20호)

국보 제20호이며, 불국사 대웅전 앞뜰에 석가탑과 함께 나란히 서 있다. 다보탑과 석가탑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견보탑품」에 근거하여 건립되었다고 한다. 즉 다보여래가 『법화경』을 설법하는 석가모니를 찬양하기 위해 보탑의 형상으로 솟아나 공중에 머물며 찬양한 후, 탑 안의 자리를 반으로 나누어 나란히 앉았다는 내용이다. 『불국사 사적기』에는 다보탑을 다보여래상주증명탑으로, 석가탑을 석가여래상주설법탑으로 지칭한다.
이 석탑은 이중기단에 삼층의 탑신을 지닌 신라의 전형석탑과 전혀 다른 형태를 지니고 있어 이형 석탑의 백미로 평가받고 있다. 탑의 층수에 대하여는 사각의 옥개석, 팔각의 옥개석을 사이에 두고 사각, 팔각난간을 별도의 층으로 해석하는 등 여러 가지 해석으로 1층설, 2층설, 3층설, 4층설 등 다양하다. 기단은 방형 평면을 기본으로 사방에 계단을 두어 전체적인 평면이 ‘亞’자 모양을 하고 있다. 계단에는 본래 난간이 가설되었던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확인할 수는 없다. 계단 윗부분 갑석 모서리에는 4마리의 사자가 배치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1마리만 남아 있다.
탑신은 사각의 옥개석과 팔각의 옥개석을 중심으로 상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팔각 옥개 처마 아랫면에는 물끊기의 기능을 하는 홈이 있다. 상륜은 노반, 복발, 앙화, 보륜, 보개, 보주가 남아 있다. 불국사 다보탑은 조형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통일신라 석조미술의 백미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다보탑은 석가여래와 다보여래의 만남을 현실공간에 탑으로 재현했을 뿐 아니라 경전에서 말하는 탑의 형태를 독창적 예술로 승화시킨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그림

 

체험학습 과제

1

1-1. 다보탑 석사자 앞에서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다보탑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사방으로 나있는 계단은 실제로 오르내리기 위해서 만들었을까에 대해서 토론하고 기록하세요.

3

다보탑은 과연 몇 층일까에 대해서 토론하고 기록하세요.

기수 문제번호 등록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