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코스 : 삼한일통의 영웅

1.체험학습경로

[제3코스] 삼국통일의 정신과 신라의 문화를 계승하는 길

삼국통일의 혁혁한 공로자들의 유적지를 돌아보며 분단의 현실을 통일의 의지로 극복할 수 있다. 또한 찬란한 신라문화의 중심지인 왕경 지역을 살펴보며 신라의 문화를 오늘에 계승할 각오를 다질 수 있다.


  • (13:00) 화랑교육원⇒20 (14:10)무열왕릉/무열왕릉귀부{50}⇒10 (14:50) 김유신묘{30}⇒10 (15:25)쪽샘유적발굴관{25}⤳10
  • (16:15)대릉원(천마총, 황남대총){40}⤳10 (16:35)첨성대{10}⤳10 (16:55) 계림{10}⤳5 (17:10)향교{10}⤳5
  • (17:25)최부자댁{10}⤳5 (17:30)교동주차장 ⇒20 (17:50)화랑교육원
  • * 입장료: 무열왕릉(600원), 김유신묘(600원), 대릉원(1,200원)

※ ‣ 도보 ⤳분 ‣ 차량 ⇒분 ‣ 유적지 내 체류 시간 { }

지도

 

1. 답사 개요

  • 삼국통일의 혁혁한 공로자들의 유적지를 돌아보면서 분단의 현실을 통일의 의지로 극복한다. 또한 찬란한 신라 문화의 중심지 왕경 지역을 살피면서 신라의 찬란한 문화를 오늘에 일으켜 세울 각오를 다진다. (도보 이동 거리 약 5km)

 

2. 유의 사항

  • 도로를 횡단하거나 따라 걷는 경우가 있으므로 교통규칙을 잘 지키고, 안전에 유의하도록특히 주의합니다.
  • 점심과 물과 간식을 반드시 준비합니다.
  • 풀섶을 통과할 수도 있으므로 운동화에 긴바지를 착용합니다.
  • 유적 유물을 훼손하지 않도록 주의하여 관찰합니다.
  • 의문은 인터넷이나 해설사를 이용하여 해결하도록 합니다.
  • 몸에 문제가 있을 때는 재빨리 인솔교사에게 말씀드려 해결을 합니다.
  • 발굴현장에서는 책임자의 허락을 받은 후에 관람합니다.

 

 

2. 과제학습

1. 경주 무열왕릉(사적 제20호) 및 무열왕릉귀부(국보 제25호)  

* 태종무열왕(603~ 661, 재위 : 654∼661)

태종무열왕의 이름은 춘추로 579년 화백회의에 의해 폐위된 진지왕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용춘이고, 어머니는 진평왕의 딸 천명부인이다. 김유신의 막내 동생인 문희를 왕비로 삼았는데 문명왕후이다.

최초의 진골 출신의 왕인 김춘추는 642년(선덕여왕 11)에 백제의 윤충 장군에 의해 대야성(지금의 합천)이 함락당하고 성주인 사위인 품석과 딸을 잃자 고구려에 가서 군사를 요청하였으나 연개소문에게 거절당하였다. 이에 위기에 처한 신라를 구하기 위해 왜국과 당나라를 오가며 외교 활동을 벌여서 당 태종으로부터 군사협력의 약속을 받았다.

647년(선덕여왕 16) 비담과 염종의 난을 진압한 뒤에 김유신과 함께 권력을 장악하였다. 654년 진덕여왕이 죽자 김유신의 지원을 받아서 왕위에 올랐다. 당나라와의 연합으로 660년 백제를 멸망시킨 후 다음해인 661년에 죽었다.

 

* 신라의 골품제도

이 제도는 골품(骨品), 즉 개인의 혈통의 높고 낮음에 따라 정치적인 출세는 물론, 혼인, 가옥의 규모, 의복의 빛깔, 우마차의 장식에 이르기까지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 여러 가지 특권과 제약이 가해졌다.

왕족을 대상으로 한 골제(骨制)와 일반 귀족을 대상으로 한 두품제(頭品制)를 합해서 골품제도라 하는데 왕족인 성골(聖骨)과 진골(眞骨)이라는 두개의 골과 6두품으로부터 1두품에 이르는 6개의 두품을 포함해 모두 8개의 신분계급으로 나누어졌다.

이 중에서 성골은 왕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최고의 신분이었는데, 진덕여왕을 끝으로 소멸되었다. 성골이 소멸되자 최초로 진골 출신인 태종무열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 뒤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모든 왕은 진골 출신이었다.

 

* 시호와 묘호

왕이나 사대부들이 죽은 뒤에 그들의 공덕을 찬양하여 추증한 호를 가리킨다. 이에 비하여 묘호(廟號, 사당묘)는 왕이 죽은 뒤 종묘에 신위를 모실 때 붙이는 용도로 추증된 것이라는 차이점이 있다. 태종무열왕은 신라의 왕으로서는 유일하게 묘호가 있는 왕이다.

시호의 예 : 문무(왕), 성덕(왕), 충무공(이순신), 문창후(최치원)

묘호의 예 : 태조, 태종, 세종, 세조…

 

* 태종무열왕릉

태종무열왕릉

경주 시가지 서쪽의 선도산에서 동쪽으로 뻗어 내린 구릉의 끝부분에 있는 5기의 대형분 가운데 가장 아래쪽에 위치한다. 원형의 봉토분으로 주위 둘레 110m에 높이가 11m이며, 매장주체는 횡혈식 석실일 것으로 추정된다. 분구의 언저리에는 호석을 받치는 자연석 받침돌들이 나와 있다.

왕릉의 위치에 대해서 『삼국사기』에는 무열왕을 영경사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삼국유사』에는 애공사 동쪽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 태종무열왕릉비(국보 제25호)

태종무열왕릉비

신라의 왕릉 중에서 주인을 알 수 있는 왕릉은 많지 않다. 그러나 무열왕릉은 무덤의 주인공을 정확히 알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왕릉이다. 그것은 무열왕릉비의 용이 새   겨진 이수 앞면 중앙 아래쪽에는 전서체로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현재는 비신(내용을 적은 비석 몸돌)을 잃고, 귀부(거북 모양 비석 받침돌)와 이수(뿔 없는 용 모양 비석 머릿돌)만 남아 있다. 귀부는 직사각형의 대석 위에 거북 모양이 올려진 것으로, 네 발과 머리의 표현은 사실적이며, 등의 전면에는 6각형의 귀갑문을 조각하고 그 주위엔 구름문양을 둘렀다. 이수는 좌우에 각각 3룡씩 6룡을 표현하고 여의주를 가지고 있는 형상으로 조각하였다. 『대동금석서』속에 의하면 김인문이 비문을 지었다고 한다.

 

체험학습 과제

1

무열왕릉 사진을 찍어 보고 무열왕에 대하여 설명해보세요.

2

이 무덤이 무열왕릉이라는 증거를 찾아서 사진을 찍고, 무덤의 주변에 박혀있는 돌(호석)은 어떤 역할을 하는지 말해보세요.

3

태종무열왕릉비의 거북이가 앞발가락은 5개인데, 뒷발가락은 왜 4개로 조각이 되어 있을까요?(실제 거북이는 앞, 뒤 모두 5개씩임) 상상력을 발휘해서 이유를 말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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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김유신묘 - 사적 제21호  

* 김유신(595 ~ 673)

본관은 김해이다. 아버지는 서현이고, 어머니는 만명이다. 본래 가야국의 시조 김수로왕의 12대손이다. 김유신은 화랑이 되어 용화향도라 불린 낭도를 이끌고 화랑정신을 길렀고, 단석산에서 삼국통일을 기원하고 무술을 닦은 뒤 국선이 되었다.

선덕여왕 말년에 상대등 비담과 염종이 일으킨 난을 토벌하였고, 고구려, 백제와의 전투에서 수많은 공을 세웠다.

654년 진덕여왕이 후사 없이 죽자 재상으로 있던 이찬 알천과 의논하여 이찬 김춘추(태종무열왕)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660년 상대등에 올랐고, 신라 정예군 5만과 소정방이 이끈 당나라군 13만이 연합하여 사비성을 함락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668년 고구려 정벌 직후 태대각간의 최고직위에 오른 후 당나라 군사를 축출하는 데 힘써 한강 이북의 고구려 땅을 수복함으로써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져 놓았다. 673년(문무왕 13) 7월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금산원에 장사지냈고, 835년(흥덕왕 10) 흥무대왕에 추존되고 경주 서악서원에 제향되었다.

 

* 김유신묘

김유신묘

김유신 묘는 송화산의 동쪽 구릉 위에 있다. 지름이 30m에 달하는 큰 원형분인데 둘레에는 호석과 돌난간을 두르고 12지신상을 갖춘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왕릉 중 최고의 형식을 갖추고 있는 무덤이다.

능의 앞에는 1970년대에 설치한 혼유석과 1710년에 당시 부윤이 세운 '신라태대각간 김유신묘(新羅太大角干 金庾信墓)'라는 표석이 있다. 호석에 새겨진 12지신상은 대단히 세련되게 양각으로 조각이 되어 있다. 몸은 사람이고 머리는 동물의 모양을 하고 있으며, 모두 평복에 무기를 잡고 있으며, 모두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다.

12지신상의 남쪽에는 오(말)가 위치하며 혼유석과 일반적으로 일치하나, 김유신 묘에서는 일치하지 않고 있다. 방위에 따라서 배치된 12지신상은 정북에 자(쥐)가 있고, 정남에 오(말)가 있다.

이곳 묘역에서 납석제 십이지신상인 묘상, 오상, 해상이 발견된 바 있다.

1973년 봉분에서 북북서쪽 16m 거리 땅속에서 납석으로 만든 해상(亥像) 하나가 발견되었는데, 이 납석상의 발견으로 인하여 1974년 김유신묘 주위의 발굴조사와 석조물 복원을 위한 실측조사 작업이 실시되었고, 그때 동쪽의 땅속에서 묘상(卯像)의 파편이 발견되었다. 이들은 높이가 30cm 정도의 작은 것으로 모두 무복을 입은 무인상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묘의 동쪽 산 밑에는 재실인 금산재가 있다.

 

* 십이지신상

 십이지신상은 단순히 동물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동물의 형상을 지닌 신이다. 그래서 동물을 뜻하는 일반적인 한자를 쓰지 않는다. 예를 들면 말 마(馬) 대신에 말 오(午), 개 견(犬) 대신에 개 술(戌) 등으로 표기하여 구별한다. 이 신들은 각각의 맡은 방위(방향)를 수호하고, 각각의 맡은 시각을 지키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면 자(쥐)상은 방위로는 북쪽을 수호하며, 시각은 자시(23:00~01:00)를 수호한다.

십이지신상의 방위와 시각은 아래 그림과 같다.

십이지신상

* 자정과 정오

 자정(子正)이라는 말은 자시(子時, 23:00~01:00)의 정가운데라는 뜻이고, 정오(正午)는 오시(午時, 11:00~01:00) 정 가운데를 뜻한다. 즉, 자정은 24:00(00:00)을 말하고, 정오는 12:00을 말한다.

 

* 오전과 오후

 오전은 아침부터 12시까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오후는 12시에서 저녁 때까지를 뜻하는 말이 아니다. 즉, 오전은 자정 이후부터 정오 직전까지 (00:00 이후~12:00 직전), 오후는 정오 이후부터 자정 직전까지 (12:00 이후~24:00 직전)의 시간대를 가리키는 것이다.

 

* 화랑도

김유신이라고 하면 화랑도를 연상할 수 있다. 국선도·풍월도·풍류도라고도 불리는 화랑도는 인물을 양성하여 그 가운데서 인재를 가려 국가에 등용함을 목적으로 하였다. 화랑도 이전에 원화제도가 먼저 있었으나 해체되었고, 이후에 화랑도가 생겼다. 화랑도의 총지도자에 국선을 두고 그 밑에 화랑이 있어 각각 문호를 맡았다. 화랑도의 총지도자인 국선은 원칙적으로 1명, 화랑은 보통 3∼4명에서 7∼8명에 이를 때도 있었으며, 화랑이 거느린 각 문호의 낭도는 수천 명을 헤아렸다.

화랑도는 원광법사가 귀산·취항 두 화랑에게 주었다는 세속오계(사군이충·사친이효·교우이신·임전무퇴·살생유택)가 화랑의 정신적 바탕을 이루었다.

화랑도는 그 창설로부터 삼국통일이 완성된 문무왕에 이르는 약 1세기 동안 융성하여, 삼국통일의 어려운 시기에는 강한 무사도정신으로 나타나 국난을 극복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나, 통일 후 나라에 태평시대가 계속되면서 쇠퇴하여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존속하였다.

 

체험학습 과제

1

김유신묘 둘레의 호석에 있는 <12지상> 중에서 자신의 띠에 해당되는 동물 앞에서 자기 얼굴과 함께 찍고, 김유신 장군에 대하여 설명해보세요.

2

정오와 자정을 표시하는 십이지신상은 각각 무엇이고, 김유신묘 십이지신상 복장의 특징을 설명해보세요.

3

신라시대 유명한 화랑의 이름을 제시하고, 화랑이 지켜야 할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설명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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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학습 과제

1

천마총 사진을 찍고, 천마총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유를 설명해보세요.

2

그림은 천마총을 발굴하면서 그린 동서 단면도입니다. 안쪽 돌이 고깔모양으로 무너져 내린 이유는 무엇일까 기록해 보세요.

천마총 발굴 단면도 동서단면

<천마총 발굴 단면도 동서단면>

3

신라시대 무덤의 호칭을 구분하고 설명해보세요.

 

 

창의․융합 심화 과제

1

이 고분은 155호분이라고 불려 왔습니다. 그런데 1973년에 발굴을 하고 현재는 ‘천마총(天馬冢)’이라고 부릅니다. 무슨 뜻인지 토론하고 정리하여 기록하세요.

2

이 그림이 천마도입니다. 그림이 그려진 유물의 용도에 대하여 토론하고 정리하여 기록하세요.

천마총 발굴 단면도 동서단면

3

천마도가 그려진 자작나무 속껍질로 된 유물이 천 년을 넘어 남았습니다. 이 유물이 썩지 않고 남을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인지 토론하고 정리하여 기록하세요.

4

그림은 발굴당시의 동서단면입니다. 봉토 흙이 안쪽으로 경사가 져있는 이유는 무엇인지 토론하고 정리하여 기록하세요.

천마총 발굴 단면도 동서단면

5

천마총에는 금관을 비롯해서 1만점이 넘는 엄청나게 많은 유물을 발굴하였습니다. 옛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유물을 무덤에 껴묻은 이유를 알아보고 정리하여 기록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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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경주 첨성대 - 국보 제31호  

첨성대

신라시대 천문을 관측하던 천문대(臺)로 알려져 있다. 석조 건축물로 높이는 9.5m이며 국보 제31호이다. 이 근방을 일반적으로 비두골 또는 비두거리 라고 하는데, 북두칠성에 다른 별을 비교해서 국가의 안위와 길흉화복을 점쳤다는 뜻이다.

구조면에서 살펴보면. 아래의 기단부, 병모양의 원통부, 다시 그 위의 정井자모양 돌로 된 정상부로 나눌 수 있다. 기단부 아래의 땅속에는 잡석과 받침돌, 그리고 기단부 서쪽으로는 일렬로 자연석이 놓여 있다. 이 기단부는 남쪽변이 정남에서 동쪽으로 19o정도 돌아가 있는데, 이 방향은 북두칠성을 바라보는 방향과 일치한다.

또 13단에서 15단에 걸쳐서 정남에서 동쪽으로 약 16。가 되는 방향을 향하여 한 변이 약 95cm되는 정사각형의 창구가 있다. 창구의 내부 아래쪽은 잡석으로 채워져 있으며, 그 위쪽은 정상까지 뚫려 속이 비어 있는 형태이다.

19단과 20단, 25단과 26단에 동서남북으로 2개씩의 긴 돌[장대석]이 걸쳐 있어 정井자모양을 이루고 있다. 27단의 원통부위에는 각 네 개씩으로 짜여진 정자석이 두 단에 걸쳐 놓여 있어서 정상부는 사각형을 이룬다. 현재로서는 남쪽면이 정남에서 서쪽으로 약 8。 정도 돌아가 있다.

돌의 갯수는 종래 365개라고 하여 왔으나, 기단석까지를 포함하느냐 않느냐에 따라 달라지므로 정확히 365개는 아니다. 1962년 12월 당시 국립경주박물관장이던 홍사준과 정영호, 유문룡 등이 확인한 바에 따르면, 기단부를 제외한 1~27단까지가 362매, 지대석 8매, 기단석 12매, 상부 정자석 8매, 중간 정자석 8매, 남측 문기둥 2매, 27단의 판석 1매로서 도합 401매이다.

 

체험학습 과제

1

첨성대 사진을 찍고, 첨성대에 대하여 설명해보세요.

2

첨성대는 신라 제 36대 혜공왕(AD779년) 진도 6.7에 해당하는 지진과 6.25전쟁, 2016년 진도 5.8의 강한 지진에도 큰 피해 없이 보존되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토론하고 설명해보세요.

3

첨성대는 천문관측에 사용되던 천문대인가, 아니면 하늘에 제사지내던 제단인가? 하나를 고르고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기록하세요.

 

체험학습 과제

1

첨성대는 과연 하늘을 관측하는 천문대였을까 아니면 하늘에 제사지내는 용도의 건축물이었을까? 아니면 또 다른 용도가 있었을까에 대해서 토론하고 정리하여 기록해보세요.

2

오늘날 천문대는 소백산이나 보현산처럼 높은 산꼭대기에 있습니다. 천문대를 왜 산꼭대기에 세워야 하는지, 토론하고 정리하여 기록해보세요.

3

신라시대처럼 근대 이전의 천문대는 도시 가운데 아니면 궁궐 안에 있었습니다. 궁궐 안이나 가까이에 있어야 하는 이유를 토론하고 정리하여 기록해 보세요.

4

첨성대의 높이를 알아보고, 그렇게 낮아도 하늘을 관측할 수 있을까에 대하여 토론하고 정리하여 기록해 보세요.

5

조선시대에 하늘을 관측하던 곳은 어디에 남아있는지 알아보고, 그 명칭을 기록해 보세요.

6

신라시대 이후에 경주지역에는 수많은 지진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첨성대는 무너지지 않고 그대로 서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토론하고 정리하여 기록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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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학습 과제

1

계림의 사진을 찍고, 느낌을 말해보세요.

2

계림 숲 속에 향가가 적혀 있는 비석이 있습니다. 향가의 제목과 내용에 대하여 설명해보세요.

3

계림에 얽힌 김알지의 탄생 설화에 대하여 토론하고 말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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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학습 과제

1

조선시대 선비들이 학습하던 명륜당 앞에서 건물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향교에 대하여 설명해보세요.

2

경주 향교가 가지는 구조상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인가를 토론하고 기록하세요.
(향교 내 건물의 배치를 참고할 것)

3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인 향교와 서원은 어떤 관계인지 조사 토론하고 기록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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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경주 최부자댁 – 국가민속문화재 제27호  

경주최부자댁

경주 최씨 가암파[佳巖波 혹은 정무공파貞武公波]의 분파인 동파東派[혹은 가암삼파佳巖三派] 종가이다. 분파 시조인 송정 최동량(松亭 崔東亮 1598~1664)은 정무공의 셋째 아들이므로 삼파라고도 하고 내남의 동쪽에 있다고 하여 동파라고 한다.

정무공 최진립(貞武公 崔震立 1568~1636)이래 내남에 살고 있었는데, 최동량 때인 1644년에 이조리에서 고택 일부를 헐어 교촌에 옮겨 짓고 이사하게 되었다. 교촌에는 옆에 향교가 있음으로 해서 부잣집의 큰 저택이 들어서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기둥을 30cm정도 잘라서 가옥의 높이는 향교 건물보다 높지 않도록 제한하는 세심함을 베풀어 겸허한 삶의 철학을 반영하였다고 한다. 이때 지어진 건물은 교동법주를 빗고 있는 가옥이다. 새집 후원 일대에는 소나무와 느티나무를 비보수로 조성하여 향교 송단과 연결하였다.

최진립의 8세손인 용암 최기영(龍庵 崔祈永 1768~1834)의 장남 응서 최세린(應瑞 崔世麟 1791~1846)이 1831년에 현재의 최씨 고택 자리에 새로이 큰 집을 짓고 내남에서 이사하였다. 이때 동쪽에 인접한 향교보다 1미터 이상 낮추어 터를 정지하였다. 또 향교와 담장이 닿지 않도록 사이에 하인들이 거주하는 가랍집을 지어 차단하였다. 원래 99칸이었다고 전하는데 사랑채, 안채, 사당, 문간채, 고방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후 후손들은 앞쪽으로 분가하여 현재와 같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향교가 있는 곳이므로 행정단위로는 교동(校洞)이라 하지만 전통적으로 교촌(校村)이라 불러 왔기에 여기서도 이를 사용한다.

 

체험학습 과제

1

경주 최부자댁 사진을 찍고, 경주 최부자댁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에 대하여 설명해보세요.

2

교촌 경주 최씨 종가댁에 전하는 여섯 가지 가르침인 “육훈”[六家訓]이 있습니다. 이를 조사하여 기록하고, 삶의 지표로 삼을 수 있는 1~2가지에 대하여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실천방안을 말해보세요.

3

교촌 경주 최씨 종가댁에는 벼슬을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는 가훈이 내려옵니다. 실제로 조선시대 중기 이후 9대에 걸쳐 진사를 배출하였다. 이렇게 높은 벼슬을 하지 못하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 토론하고 설명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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