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코스 : 신라 천년 도읍지

1.체험학습경로

[제4코스] 신라의 문화를 탐방하는 길

신라 왕경 중심지에 위치한 분황사와 황룡사지를 통해 신라문화의 일부를 알 수 있다. 또한 대릉원과 노동 노서동고분군 및 쪽샘 유적발굴관을 통해 신라의 대표적 묘제인 적석목곽분과 관련된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


  • (13:00) 화랑교육원⇒(13:30)10 분황사{20}⤳10 (14:20)황룡사지{40}⤳15 (15:05) 동궁과 월지{30}⤳5 (15:30)월성/석빙고{20}⤳10
  • (15:50) 계림{10}⤳5 (16:05) 향교{10}⤳5 (16:20)최부자댁{10}⤳10 (16:40)첨성대{10}⤳5 (17:25)대릉원(천마총, 황남대총){40}⤳5
  • (17:30)대릉원주차장⇒ 20 (17:50)화랑교육원 * 입장료: 분황사(1000원), 동궁과 월지(1200원), 대릉원(1,200원)

※ ‣ 도보 ⤳분 ‣ 차량 ⇒분 ‣ 유적지 내 체류 시간 { }

지도

 

1. 답사 개요

  • 신라 왕경 중심지에 위치한 분황사와 황룡사지를 통해서 신라 불교 문화의 단면을 학습하고자 한다. 월지와 석빙고 그리고 계림, 첨성대를 통해서 신라 문화의 일부를 알게 될 것이다. 또 대릉원과 노동 노서동고분군 및 쪽샘 유적발굴관을 이용하여 신라의 대표적 묘제인 적석목곽분과 관련된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게 한다.

 

2. 유의 사항

  • 도로를 횡단하거나 따라 걷는 경우가 있으므로 교통규칙을 잘 지키고, 안전에 유의하도록특히 주의합니다.
  • 점심과 물과 간식을 반드시 준비합니다.
  • 풀섶을 통과할 수도 있으므로 운동화에 긴바지를 착용합니다.
  • 유적 유물을 훼손하지 않도록 주의하여 관찰합니다.
  • 의문은 인터넷이나 해설사를 이용하여 해결하도록 합니다.
  • 몸에 문제가 있을 때는 재빨리 인솔교사에게 말씀드려 해결을 합니다.
  • 발굴현장에서는 책임자의 허락을 받은 후에 관람합니다.

 

 

2. 과제학습

1. 경주 분황사  

경주 분황사

과거불 시대 일곱 곳 가람중의 하나라고 하는데, 선덕여왕 3년(634년) 용궁의 북쪽에 건립하였다. 창건 10년 뒤에는 중국에서 돌아온 자장법사가 머물렀다. 또 원효는 이곳에 머물면서 화엄경소, 금광명경소 등의 수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그의 교학은 이 절을 중심으로 널리 펴게 됨에 따라 분황사는 법상종의 근본 도량이 되었다. 원효가 죽은 뒤 아들 설총은 아버지의 유해로 소상을 만들어 이 절에 안치하고 죽을 때까지 공경하고 사모하는 뜻을 다하였다. 언젠가 설총이 옆에서 절을 하자 소상이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고 한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저술할 때까지 원효의 소상이 고개를 돌린 채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 밖에도 이 절에는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이 있었고 왼쪽 건물 북쪽 벽에 있었던 천수대비 그림은 영험이 있기로 유명했다.

755년(경덕왕 14년) 약사여래입상을 만들어서 이 절에 봉안하였는데, 그 무게는 30만 670근으로 만든 사람은 본피부의 강고 내말이라는 사람이었다.

고려시대 1101년 (숙종 6) 8월에 내린 숙종의 조서에 의해 원효 화쟁국사의 비가 건립되었다. 숙종은 원효와 의상이 동방의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비와 시호가 없어 그 덕이 크게 드러나지 않음을 애석하게 여겼다. 원효에게 대성 화쟁국사(大聖 和諍國師)라는 시호와 함께 유사로 하여금 연고지에 비석을 세우게 한 것이다. 화쟁국사비의 비편은 지금도 가끔 발견되고 있는데 비신을 받쳤던 비대는 절 근처에서 발견되어 추사 김정희가 이를 확인하였다. 비대 한 켠 에는 지금도 “차 신라 화쟁국사지비부 김정희(此新羅和諍靜國師之碑趺 金正喜)”라는 추사가 확인하고 남긴 글씨가 있다.

몽골의 침입과 임진왜란 등으로 이 절은 크게 손상을 입었으며, 그 뒤의 자세한 역사는 전해지지 않는다. 현재 있는 건물로는 약사여래입상을 모신 보광전과 승방, 종각 등이 있으며, 국보 제30호인 분황사석탑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인 화쟁국사비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호 석정(石井 돌 우물) 등이 있다.

이중 석탑은 원래 9층이었으나, 현재 3층만이 남아있다. 벽돌 탑을 모방한 모전석탑으로서 임진왜란 당시 왜구들이 이 탑을 반쯤 헐었다고 한다. 그 뒤 절의 승려들이 탑을 다시 쌓기 위해서 헐었더니 바둑알만한 작은 구슬이 출토되었는데, 그 구슬은 수정처럼 빛나고 투명하였으며 태양을 쪼여 솜을 가까이 하면 불길이 일어났다고 한다.

또 탑 옆에 있는 석정은 삼룡변어정(三龍變魚井)이라고 불리는 신라시대의 우물이라고 전해진다. 우물 틀의 외부는 8각이고 내부는 원형인데, 이것은 불교의 8정도(正道 바른 길)와 원융의 진리를 뜻한다고 한다.

발굴조사는 3차에 걸쳐 실시되었다. 1차로 1975년 2월 8일부터 18일까지 동국대학교박물관에 의해서 실시되었고, 2차는 1975년 11월 8일부터 12월 4일까지 동국대학교박물관에 의해 이루어졌다. 당시 조사에서 금동보살입상과 귀면기와, 신라 및 고려시대 기와 등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당시 발굴은 보광전 주위만 하였던 관계로 서향한 건물지의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법당터만 확인하고 절의 방향도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17년 뒤 1992년 4월 21일에서 9월 22일까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제3차 발굴을 실시한 결과 분황사의 가람배치가 1탑3금당형식이었음을 확인하였다. 즉, 품(品)자 모양 가람배치로써 이는 신라문화권에서는 처음 밝혀진 것이다. 옛 고구려지역에서 밝혀진 品자 모양 가람배치는 세 개의 금당 정면이 모두 탑을 향하고 있는 반면 분황사는 탑을 중앙 금당 앞쪽에 두고, 세 개의 금당 모두 남향하고 있는 것이 고구려와 다른 신라적인 특색이다. 또 이 가람배치는 오랜 기간을 지나면서 1탑3금당에서 1탑1금당으로 변하는데, 중앙 금당은 창건 이후 같은 자리에서 최소한 3차례 확대 또는 축소되면서 방향도 남향에서 서향으로 바뀌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1965년 12월 분황사 뒷담으로부터 30m 떨어진 우물 속에서 석조 좌불상 13구, 석조 보살입상 1구, 석조 부처 머리 5점, 석조 광배 1점 등이 출토되었다. 이 불상들이 출토된 곳은 우물이지만 원래는 분황사의 강당지로 추정되는 곳이다. 또한 이 불상들이 모두 목이 잘린 채 우물 속에 들어가 있었던 것은 조선시대 불교를 배척한 사상의 영향으로 경내에 있던 석불들을 모두 우물에 넣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그 후 이 우물을 매몰하고 경작지로 만든 듯하다. 이 불상군은 분황사라고 하는 한 절에서 다량으로 출토된 조각품으로써 당시 분황사를 중심으로 하는 하나의 조각파가 존재하였음을 짐작케 하고 있다. 현재 이들은 국립경주박물관 정원에 함께 전시되고 있다.

 

체험학습 과제

1

분황사 모전석탑의 사진을 찍고, 분황사에 대하여 설명해보세요.

2

분황사 석탑을 모전석탑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3

그림은 모전석탑 주변의 축대 기단의 일부이다. 이런 수법을 무엇이라고 장점은 무엇인가를 말해 보세요.

모전석탑 주변의 축대 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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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경주 분황사  

경주 분황사

신라 제24대 진흥왕 때 처음 세웠던 사찰터로 사적 제6호이다. 황룡사는 진흥왕이 나이 7세에 왕위에 올라 21세 되던 해인 553년에 월성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짓고자 하였다. 그런데 그곳에서 황룡이 나타났으므로 궁궐대신 사찰로 고쳐 짓게 되었고, 그로 인해 황룡사(黃龍寺)라 이름 하였다. 553년에 짓기 시작하여 569년에 주위에 돌담장을 둘러 경계를 마련하여 일단 사찰의 기본이 완료된 것으로 보인다. 그 뒤 574년에 5m가 넘는 주존불[장육존상]을 비롯해서 금동삼존불을 만들고, 이 삼존불을 모시기 위한 금당을 10년 후인 584년(진평왕 6)에 세웠다.

황룡사터에 대한 발굴조사는 1970년대에 들어서 본격화되었다. 문화재관리국에 경주고적발굴조사단이 결성되고, 1976년 6월부터 발굴조사에 착수하여 1983년 12월까지 8년 동안 진행되었다.

발굴조사 결과 당초 늪지를 매립하여 터를 마련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사찰의 건물배치는 남문, 중문, 탑, 금당, 강당이 남북일직선으로 배치되고 금당 좌우에 작은 금당이 추가된 이른바 1탑 3금당식 가람배치를 기본으로 하였다. 탑의 전방 좌우 대칭의 위치에 종루와 경루를 마련하였음이 확인되었다. 또한 강당의 좌우에도 독립된 건물을 배치하였음이 밝혀졌고, 동서남북으로 마련된 회랑이 서로 연결되지 않고 독립된 상태였음이 확인되었다.

이 밖에도 이 절은 규모면에서 동양 최대의 사찰이었음이 확인되었고, 9층목탑 또한 그 존재를 확신하게 되었다. 또 목탑지의 심초석 아래에서 발견된 작은 백자 항아리는 당나라 제품으로 밝혀져 당시의 문물교류를 알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그리고 높이 182cm, 최대 너비 105cm되는 초대형의 치미는 일본이나 중국에서도 아직까지 발견된 예가 없어 동양 최대의 치미라 할 수 있다. 아울러 이렇게 큰 치미가 사용된 건물이라면 그 웅장함도 대단하였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 금당 건물의 벽에 솔거가 그린 노송도(老松圖)는 얼마나 사실적이었기에 날아가는 새들이 진짜 나무로 생각하고 앉으려다 벽에서 미끄러져 떨어졌다고 전한다

 

체험학습 과제

1

황룡사지의 목탑지 또는 금당지에서 남산, 선도산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폐허가 된 황룡사지에 대한 느낌을 말해보세요.

2

황룡사는 제24대 진흥왕 때 시작하여 27대 선덕여왕 때 절을 완성하였다. 선덕여왕이 만든 황룡사 9층 목탑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 몇 층 높이에 해당할까요?
또한 선덕여왕이 9층 목탑을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요?

3

황룡사에는 신라삼보(新羅三寶) 중 9층 목탑과 더불어 장육존상 2개의 보물이 있었다 한다. 금당지에는 1238년 몽고의 침입 때 안타깝게도 화재로 장육존상이 소실되고 난 후 두 다리와 신광을 꽂았던 구멍이 있고 그으로 갈라진 3개의 자연석 대좌가 있어 삼존불상이었던 여겨진다. 금당지 자연석 대좌를 보면서 장육이란 1장 육척으로 현대적 개념으로 환산하면 약 5m에 달한다.
장육존상의 웅장함을 상상해보면서 금당지에서의 느낌을 말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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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학습 과제

1

동궁과 월지의 사진을 찍고, 월지에 대한 느낌을 말해보세요.

2

월지를 얼마 전까지 “안압지(雁鴨池)”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3

월지는 인공 연못입니다. 특히 입수구에는 연못의 물 흐름을 고려하여 매우 과학적인 기법을 적용하였는데 어떠한 방법인가요?
또한 동궁과 월지는 어떠한 용도로 사용이 되었을까요?

 

 

창의․융합 심화 과제

1

이곳의 명칭에 들어있는 ‘동궁’이 어떤 의미인지 토론하고 정리하여 기록하세요.

2

경주 동궁과 월지

그림은 월지로 물이 들어오는 부분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이 장치를 찾아 사진을 찍고, 이 장시의 역할을 토론하고 정리하여 기록하세요.

3

경주 동궁과 월지

그림과 같은 장치를 찾아보세요. 물 속에 잠겨서 제대로 보이지는 않지만 구멍이 4곳에 뚫려있습니다. 이들 구멍의 역할을 토론하고 정리하여 기록하세요.

4

경주 동궁과 월지

월지의 물이 어떻게 순환되는가를 해설하는 그림입니다. 두 가지 가운데 어느 쪽이 가능성이 큰지를 선택하여 토론하고 정리하여 기록하세요.

5

경주 동궁과 월지

그림과 같은 주사위의 명칭은 무엇일까요? 사각형 면과 삼각형 면이 각각 몇 개씩으로 구성되었는지를 토론하고 정리하여 기록하세요.

6

경주 동궁과 월지

그림은 여름철 월지에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런 현상을 무엇이라고 하며, 원인은 무엇인가를 토론하고 정리하여 기록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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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경주 월성 - 사적 제16호  

경주월성

월지 서남편에 있는 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왕궁이었으며 사적 제16호이다. 흙과 돌로 쌓은 도성으로 현재 부분적으로 성벽과 건물지가 있다. 이러한 신월성은 경주 시가지를 중심으로 보아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행정구역상으로는 경주시 인왕동 449-2번지 등이다.

남천(문천 또는 사천) 북쪽에 접한 낮은 언덕을 연결하고 자연 지세를 최대한 이용해 성벽을 쌓았기 때문에 성곽의 형태가 반월형(사실은 초승달 모양)을 이루고 있다. 동쪽, 서쪽, 북쪽은 낮은 12개의 산봉을 연결하여 쌓았고, 남쪽은 자연 지세를 많이 활용하여 쌓았는데, 지형이 절벽을 이루기 때문에 성

벽의 외부를 손질하는 정도로 쌓았을 것이라 추측되고 있다. 성벽 기저부 까지 남천의 물이 와 닿고 있다.

성안의 전체적인 지세는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으며, 성안 지반의 높이는 성밖보다 약 7m가 높고, 남천을 접한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세 성벽은 약간 높은 언덕과 같이 토루가 둘러져 있다. 현재 성벽 중 가장 높은 곳은 국립경주박물관과 연접한 곳인 동남쪽으로 약 10~18m가 된다. 성의 규모는 동서 860m, 남북 250m, 성 전체 둘레는 1841m, 면적은 1830.600m2이다.

월성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은 일제강점기시대와 1979과 1980년에 부분적인 발굴을 하였던 적이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월정교 부근의 성벽을 조사하였는데, 성벽의 너비는 36척(10.9m), 높이는 중앙에서 12척(306m) 내외였다고 한다. 또한 성벽 밑은 김해식 토기를 포함한 철기시대 문화층이 있었다. 1979~1980년에 있었던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발굴은 월지로 통하는 동북문지로 토성의 기단부 석렬과 구조물에 대한 흔적 등이 확인되었다.

원래 월성 안에는 남문과 정문격인 귀정문, 북문, 인화문, 현덕문, 무평문, 준례문 등의 문과 월상루, 망덕루, 명학루, 고루 등의 누각, 왕이 정사를 보던 남당, 신하의 조하를 받고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조원전, 양궁, 사량궁, 대궁을 관할하던 새성 등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터만 추정될 뿐이다.

월성에는 호공과 석탈해, 비담과 염종의 난 때에 김유신과 김춘추가 이곳을 근거지로 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경덕왕과 충담사의 찬기파랑가 등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월성 안에는 경주 석씨의 시조를 모시던 숭신전도 있었으나 1980년 동천동 석탈해왕릉 동남쪽으로 옮겼다. 동쪽의 명활성, 서쪽의 서형산성, 남쪽의 남산신성, 북쪽의 북형산성이 나성의 역할을 하였다. 월성 주위에는 사방으로 해자가 둘러져 있어 성을 호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월성 내부와 해자에 대한 대대적인 발굴이 진행 중에 있어 멀지 않아 그 전모가 밝혀질 것으로 기대가 된다.

 

체험학습 과제

1

월성의 사진을 찍고, 월성에 대한 느낌을 말해보세요.

2

월성을 둘러 싼 인공과 자연의 물길이 있는데 이를 무엇이라 하며 왜 만들었을까요?

3

월성에 얽힌 탈해와 호공의 설화에 대하여 설명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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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경주 석빙고 - 보물 제66호  

석빙고

월성 북쪽 성루 중간 지점에 성루를 자르고 남쪽에 입구를 내었으며 안으로 들어갈수록 바닥이 경사지게 하여 물을 성 밖으로 배출하도록 설치돼 있는데, 보물 제66호이다. 내부는 동서로 무지개 구조[홍예] 5개를 틀어 올리고, 홍예와 홍예 사이의 천장에는 세 곳에 배기공을 설치하였다.

출입구 높이는 1.8m, 너비 2.0m의 크기로 만들고, 계단을 설치하여 밑으로 내려가게 되어 있다.『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3대 유리왕 때부터 얼음 창고가 있었다고 하였으며, 『삼국사기』에는 지증왕 6년 11월에 유사에게 명하여 얼음을 저장하도록 하였다는 기사가 보인다. 이로 미루어 보면 신라시대에는 일찍부터 얼음을 저장하여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경주시 내남면 노곡리에서도 근래에 얼음저장고로 보이는 유적이 발굴되기도 하였다.

월성에 있는 현재의 석빙고에 대해서는 신라시대에 축조한 것을 현재 위치로 옮겼다는 설과 조선시대 축조설로 나눌 수 있다. 신라시대 축조설은 일제강점기시대 일본인학자들에 의해 주장되었고, 조선시대 축조설은 1960년대에 고 이화여대 진홍섭교수에 의해 제기되었다. 진홍섭교수는 조선시대에 이곳에 석빙고를 설치한 이유로 첫째, 성 남쪽에 남천이 흐르고 있어 채빙하기에 편하다는 점, 둘째, 성루의 경사를 이용할 수 있었다는 점, 셋째, 전체적인 구조와 설계가 조선시대에 세워진 청도 석빙고, 대구광역시 기상대 내에 있는 석빙고비명, 안동 석빙고, 경남 창녕읍 석빙고 등과 같다고 하였다. 이외에도 축조년대를 알 수 없는 석빙고인 창녕군 영산면 석빙고, 달성군 현풍읍 석빙고 등을 예로 하면서 모두 조선시대로 축조연대를 추정했다. 아울러 경주의 석빙고도 경상북도, 경상남도의 석빙고와 마찬가지로 18세기 전반에 축조되었을 것이라 하였다. 이 석빙고 서쪽에 있는 석빙고 관련 비에 의하면 1738년(영조14년)에 당시 경주 부윤이던 조명겸이 나무로 된 얼음 창고[빙고]를 돌로 된 얼음 창고로 축조하였다는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또 석빙고 입구 이맛돌에는 “숭정기원후 재신유 이기 개축(崇貞紀元後再辛酉移基改築)”이라고 쓰여 있어, 4년 뒤에 동쪽으로 100m정도 옮겨 현재 위치에 다시 쌓았음을 알 수 있다. 옮기기 전의 옛 위치는 서쪽에 남아있다.

석빙고

<석빙고 내부 입구 계단>

 

체험학습 과제

1

석빙고 사진을 찍고, 느낌을 말해보세요.

2

경주 석빙고는 신라시대에 축조된 것일까요, 아니면 조선시대에 축조된 것인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고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설명해보세요. 또한 경주 석빙고를 제외한 다른 곳의 석빙고는 어디에 있고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3

석빙고의 구조적 장점에 대하여 아래 도면을 참고하여 토론하고 설명해보세요.


과제그림1

 

 

창의․융합 심화 과제

1

이곳에 있는 ‘얼음 창고[빙고氷庫]’는 돌을 쌓아서 만들었기 때문에 ‘석빙고(石氷庫, 돌로 된 얼음 창고)’라고 부릅니다. 이곳 석빙고는 신라시대에 만들었을까요? 아니면 조선시대에 만들었을까요?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고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토론하고 정리하여 기록해보세요.

2

이곳 석빙고는 입구를 남쪽을 향해서 만들었습니다. 입구를 남쪽으로 하였을 때의 장점에 대하여 토론하고 정리하여 기록해보세요.

3

석빙고 위쪽에는 그림에서처럼 세 곳에 환기창이 있습니다. 이들이 필요한 이유를 토론하여 정리하여 기록해보세요.


과제그림1

4

얼음을 쌓을 때, 얼음만 쌓으면 주변 공기와 접촉으로 인해 빨리 녹아서 다음해 여름까지 저장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주변의 열을 차단하는 수단으로 어떤 방법을 사용했을까 토론하고 정리하여 기록해보세요.

5

얼음이 녹으면 물이 고이게 됩니다. 얼음이 녹은 물은 어떻게 처리하였는가를 토론하여 정리하여 기록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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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학습 과제

1

계림의 사진을 찍고, 느낌을 말해보세요.

2

계림 숲 속에 향가가 적혀 있는 비석이 있습니다. 향가의 제목과 내용에 대하여 설명해보세요.

3

계림에 얽힌 김알지의 탄생 설화에 대하여 토론하고 말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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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학습 과제

1

조선시대 선비들이 학습하던 명륜당 앞에서 건물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향교에 대하여 설명해보세요.

2

경주 향교가 가지는 구조상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인가를 토론하고 기록하세요.
(향교 내 건물의 배치를 참고할 것)

3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인 향교와 서원은 어떤 관계인지 조사 토론하고 기록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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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경주 최부자댁 – 국가민속문화재 제27호  

경주최부자댁

경주 최씨 가암파[佳巖波 혹은 정무공파貞武公波]의 분파인 동파東派[혹은 가암삼파佳巖三派] 종가이다. 분파 시조인 송정 최동량(松亭 崔東亮 1598~1664)은 정무공의 셋째 아들이므로 삼파라고도 하고 내남의 동쪽에 있다고 하여 동파라고 한다.

정무공 최진립(貞武公 崔震立 1568~1636)이래 내남에 살고 있었는데, 최동량 때인 1644년에 이조리에서 고택 일부를 헐어 교촌에 옮겨 짓고 이사하게 되었다. 교촌에는 옆에 향교가 있음으로 해서 부잣집의 큰 저택이 들어서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기둥을 30cm정도 잘라서 가옥의 높이는 향교 건물보다 높지 않도록 제한하는 세심함을 베풀어 겸허한 삶의 철학을 반영하였다고 한다. 이때 지어진 건물은 교동법주를 빗고 있는 가옥이다. 새집 후원 일대에는 소나무와 느티나무를 비보수로 조성하여 향교 송단과 연결하였다.

최진립의 8세손인 용암 최기영(龍庵 崔祈永 1768~1834)의 장남 응서 최세린(應瑞 崔世麟 1791~1846)이 1831년에 현재의 최씨 고택 자리에 새로이 큰 집을 짓고 내남에서 이사하였다. 이때 동쪽에 인접한 향교보다 1미터 이상 낮추어 터를 정지하였다. 또 향교와 담장이 닿지 않도록 사이에 하인들이 거주하는 가랍집을 지어 차단하였다. 원래 99칸이었다고 전하는데 사랑채, 안채, 사당, 문간채, 고방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후 후손들은 앞쪽으로 분가하여 현재와 같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향교가 있는 곳이므로 행정단위로는 교동(校洞)이라 하지만 전통적으로 교촌(校村)이라 불러 왔기에 여기서도 이를 사용한다.

 

체험학습 과제

1

경주 최부자댁 사진을 찍고, 경주 최부자댁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에 대하여 설명해보세요.

2

교촌 경주 최씨 종가댁에 전하는 여섯 가지 가르침인 “육훈”[六家訓]이 있습니다. 이를 조사하여 기록하고, 삶의 지표로 삼을 수 있는 1~2가지에 대하여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실천방안을 말해보세요.

3

교촌 경주 최씨 종가댁에는 벼슬을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는 가훈이 내려옵니다. 실제로 조선시대 중기 이후 9대에 걸쳐 진사를 배출하였다. 이렇게 높은 벼슬을 하지 못하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 토론하고 설명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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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경주 첨성대 - 국보 제31호  

첨성대

신라시대 천문을 관측하던 천문대(臺)로 알려져 있다. 석조 건축물로 높이는 9.5m이며 국보 제31호이다. 이 근방을 일반적으로 비두골 또는 비두거리 라고 하는데, 북두칠성에 다른 별을 비교해서 국가의 안위와 길흉화복을 점쳤다는 뜻이다.

구조면에서 살펴보면. 아래의 기단부, 병모양의 원통부, 다시 그 위의 정井자모양 돌로 된 정상부로 나눌 수 있다. 기단부 아래의 땅속에는 잡석과 받침돌, 그리고 기단부 서쪽으로는 일렬로 자연석이 놓여 있다. 이 기단부는 남쪽변이 정남에서 동쪽으로 19o정도 돌아가 있는데, 이 방향은 북두칠성을 바라보는 방향과 일치한다.

또 13단에서 15단에 걸쳐서 정남에서 동쪽으로 약 16。가 되는 방향을 향하여 한 변이 약 95cm되는 정사각형의 창구가 있다. 창구의 내부 아래쪽은 잡석으로 채워져 있으며, 그 위쪽은 정상까지 뚫려 속이 비어 있는 형태이다.

19단과 20단, 25단과 26단에 동서남북으로 2개씩의 긴 돌[장대석]이 걸쳐 있어 정井자모양을 이루고 있다. 27단의 원통부위에는 각 네 개씩으로 짜여진 정자석이 두 단에 걸쳐 놓여 있어서 정상부는 사각형을 이룬다. 현재로서는 남쪽면이 정남에서 서쪽으로 약 8。 정도 돌아가 있다.

돌의 갯수는 종래 365개라고 하여 왔으나, 기단석까지를 포함하느냐 않느냐에 따라 달라지므로 정확히 365개는 아니다. 1962년 12월 당시 국립경주박물관장이던 홍사준과 정영호, 유문룡 등이 확인한 바에 따르면, 기단부를 제외한 1~27단까지가 362매, 지대석 8매, 기단석 12매, 상부 정자석 8매, 중간 정자석 8매, 남측 문기둥 2매, 27단의 판석 1매로서 도합 401매이다.

 

체험학습 과제

1

첨성대 사진을 찍고, 첨성대에 대하여 설명해보세요.

2

첨성대는 신라 제 36대 혜공왕(AD779년) 진도 6.7에 해당하는 지진과 6.25전쟁, 2016년 진도 5.8의 강한 지진에도 큰 피해 없이 보존되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토론하고 설명해보세요.

3

첨성대는 천문관측에 사용되던 천문대인가, 아니면 하늘에 제사지내던 제단인가? 하나를 고르고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기록하세요.

 

체험학습 과제

1

첨성대는 과연 하늘을 관측하는 천문대였을까 아니면 하늘에 제사지내는 용도의 건축물이었을까? 아니면 또 다른 용도가 있었을까에 대해서 토론하고 정리하여 기록해보세요.

2

오늘날 천문대는 소백산이나 보현산처럼 높은 산꼭대기에 있습니다. 천문대를 왜 산꼭대기에 세워야 하는지, 토론하고 정리하여 기록해보세요.

3

신라시대처럼 근대 이전의 천문대는 도시 가운데 아니면 궁궐 안에 있었습니다. 궁궐 안이나 가까이에 있어야 하는 이유를 토론하고 정리하여 기록해 보세요.

4

첨성대의 높이를 알아보고, 그렇게 낮아도 하늘을 관측할 수 있을까에 대하여 토론하고 정리하여 기록해 보세요.

5

조선시대에 하늘을 관측하던 곳은 어디에 남아있는지 알아보고, 그 명칭을 기록해 보세요.

6

신라시대 이후에 경주지역에는 수많은 지진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첨성대는 무너지지 않고 그대로 서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토론하고 정리하여 기록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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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학습 과제

1

천마총 사진을 찍고, 천마총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유를 설명해보세요.

2

그림은 천마총을 발굴하면서 그린 동서 단면도입니다. 안쪽 돌이 고깔모양으로 무너져 내린 이유는 무엇일까 기록해 보세요.

천마총 발굴 단면도 동서단면

<천마총 발굴 단면도 동서단면>

3

신라시대 무덤의 호칭을 구분하고 설명해보세요.

 

 

창의․융합 심화 과제

1

이 고분은 155호분이라고 불려 왔습니다. 그런데 1973년에 발굴을 하고 현재는 ‘천마총(天馬冢)’이라고 부릅니다. 무슨 뜻인지 토론하고 정리하여 기록하세요.

2

이 그림이 천마도입니다. 그림이 그려진 유물의 용도에 대하여 토론하고 정리하여 기록하세요.

천마총 발굴 단면도 동서단면

3

천마도가 그려진 자작나무 속껍질로 된 유물이 천 년을 넘어 남았습니다. 이 유물이 썩지 않고 남을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인지 토론하고 정리하여 기록하세요.

4

그림은 발굴당시의 동서단면입니다. 봉토 흙이 안쪽으로 경사가 져있는 이유는 무엇인지 토론하고 정리하여 기록하세요.

천마총 발굴 단면도 동서단면

5

천마총에는 금관을 비롯해서 1만점이 넘는 엄청나게 많은 유물을 발굴하였습니다. 옛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유물을 무덤에 껴묻은 이유를 알아보고 정리하여 기록하세요.

기수 문제번호 등록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