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코스 : 충(忠)과 효(孝)의 의미

1.체험학습경로

[제6코스] 신라인의 호국정신이 서려 있는 길

신라 왕릉의 표본 원성왕릉과 불교건축의 핵심 장소인 불국사를 통해 신라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다. 특히 보기 드문 국보이자 뛰어난 조각의 오층탑이 있는 장항리사지, 감은사지를 통해 호국정신을 고취할 수 있다.


  • (13:00)화랑교육원⇒50 (14:50)주상절리군{60}⇒15 (15:15)이견대(대왕암 바닷가){10}⇒5 (15:40)감은사지{20}⇒20 (17:30)불국사{90}⇒20 (17:50)화랑교육원 *입장료: 불국사(3000원)

※ ‣ 도보 ⤳분 ‣ 차량 ⇒분 ‣ 유적지 내 체류 시간 { }

지도

 

1. 답사개요

  • 신라 왕릉의 표본- 원성왕릉
  • 불교 건축의 핵심 장소 - 불국사
  • 보기 드문 국보. 뛰어난 조각의 오층탑이 있는 - 장항리사지
  • 신라 호국정신깃든 -감은사지
  • 새롭게 등장한 명소 - 양남 주상절리군(자연유적)

 

2. 유의 사항

  • 도로를 횡단하거나 따라 걷는 경우가 있으므로 교통규칙을 잘 지키고, 안전에 유의하도록특히 주의합니다.
  • 점심과 물과 간식을 반드시 준비합니다.
  • 풀섶을 통과할 수도 있으므로 운동화에 긴바지를 착용합니다.
  • 유적 유물을 훼손하지 않도록 주의하여 관찰합니다.
  • 의문은 인터넷이나 해설사를 이용하여 해결하도록 합니다.
  • 몸에 문제가 있을 때는 재빨리 인솔교사에게 말씀드려 해결을 합니다.
  • 발굴현장에서는 책임자의 허락을 받은 후에 관람합니다.

 

 

2. 과제학습

1. 경주 양남 주상절리군 - 천연기념물 제536호  

* 주상절리(柱狀節理)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그림

마그마에서 분출한 1000℃이상의 뜨거운 용암은 상대적으로 차가운 지표면과 접촉하는 하부와 차가운 공기와 접촉하는 상부에서부터 빠르게 냉각된다. 빠르게 냉각하는 용암은 빠르게 수축하게 되어 용암의 표면에는 가뭄에 논바닥이 갈라지듯이 오각형 혹은 육각형 모양의 틈(節理)이 생기게 된다. 이렇게 냉각 수축 작용으로 생긴 틈이 수직한 방향으로 연장되어 발달하면 기둥모양(柱狀)의 틈이 생기데 되는데 이를 주상절리(柱狀節理)라 한다.

신생대 말기에 이 지역에 <수직주상절리>는 물론, 경사지거나 심지어 <누워있는 주상절리>도 형성하였다. 동해의 푸른 바다와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만들어내는 여러 형태의 주상절리들은 신비하고 아름다운 전경뿐 만 아니라 옛날에 있었던 화산활동을 연구하는 중요한 학술적인 자료가 된다.

우리나라의 주상절리하면 제주도 남부해안의 것이 대표적이다. 규모가 크고 범위도 넓으나 주로 수직 주상절리 들이다. 경주 동해의 주상절리는 규모는 작으나 수직과 수평, 그리고 꽃모양 등 다양한 것들이 모여 있어 값지다. 특히 그 형태가 완전한 꽃모양의 <부채꼴 주상절리>가 해안 가까이 절절한 장소에 펼쳐져 있어 멋진 관광 정소가 되고 있다.

 

* 읍천리 <부채꼴 주상절리>

그림

주상절리의 방향은 냉각이 진행되는 방향과 일치한다. 뜨거운 용암이 지표로 분출하여 빠르게 냉각될 때 일반적으로 아래로는 지표면, 위로는 공기와 접촉하여 냉각된다. 따라서 대체로 수직 방향으로 절리가 발전하게 되며, 수직 기둥모양의 주상절리가 많이 만들어 진다.

신생대 말기에 이곳에 분출한 현무암질 용암에서 발달한 주상절리는 수직방향보다는 수평으로 누워있는 많은 주상 절리들이 많은데, 그중에서 특별한 지형 구조에 의해 마그마가 부채 살처럼 퍼지면서 식어져 <부채꼴 주상절리>가 만들어 진 것이다. 그 모습이 마치 한 송이 해국이 바다위에 곱게 핀 것처럼 보여 ‘동해의 꽃’이라고도 부른다.

이곳 읍천리 <부채꼴 주상절리>는 국내에서 최초로 발견된 독특한 형태로 세계적으로도 매우 드문 사례이며, 시각적인 아름다움과 함께 그 생성과정에 있어서 학술적인 가치가 높다.

 

* 누워있는 주상절리

그림

주상절리는 뜨거운 용암이 빠르게 식으면서 만들어지는 구조이다. 특히 <누워있는 주상절리>는 지하의 뜨거운 마그마가 지각의 약한 틈을 따라 지상으로 올라오다가 식거나, 땅위로 분출된 용암이 움푹한 작은 하천이나 땅의 갈라진 틈을 따라 흐르다가 식을   때 만들어 질 수 있다.

동해안 일대는 신생대 말기에 현무암질 용암이 광범위하게 분출했던 지역이다. 이 주상절리는 이러한 현무암질 용암이 냉각되면서 만들어진 다양한 종류의 주상절리들 중의 하나이며 5각 혹은 6각형의 돌기둥들이 수평으로 발달되어 있다. 장작을 가지런히 쌓아 놓은 듯이 누워있는 주상절리는 자연이 만들어낸 독특한 아름다운 모습을 보존하고 있어서 학술 및 자연 유산적인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체험학습 과제

1

주상절리의 형태별 모양(부채꼴 모양, 누워 있는 모양 등)을 찍고, 주변 바다와의 어울림에 대한 느낌을 말해보세요.

2

<주상절리(柱狀節理)>라는 단어의 뜻과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는지를 설명하고, 이곳을 제외하고 우리나라 어느 곳에 주상절리가 있는지 말해보세요.

3

부채꼴 모양의 주상절리의 모양은 어떻게 생겨났는지 토론하고 설명해보세요.

 

 

창의․융합 심화 과제

1

주상절리는 어떤 뜻이며, 어떤 암석에서 잘 만들어지는가에 대하여 토론하고 정리하여 기록하세요.

2

그림

그림과 비슷한 누운 주상절리를 찾고 각자 한 개씩, 주상절리의 지름을 측정합니다. 결과 수치를 서로 비교․토론하고 정리하여 기록하세요.

3

그림

답사를 하면서 그림과 같은 장소를 찾아보세요. 양남주상절리군 답사지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이렇게 자갈이 쌓인 층이 있습니다. 이렇게 높은 지역에 자갈이 쌓이게 된 과정에 대해 토론하고 정리하여 기록하세요.

4

전망대 1층을 관람하면서, 암석을 분류할 때 현무암이나 안산암이 어떤 부류에 속하는가를 토론하고 정리하여 기록하세요.

5

경주 양남주상절리군의 특징에 대하여 토론하고 정리하여 기록하세요.

6

전망대 4층에 올라가면, 서쪽 도로가 보이는 정면을 중심으로 좌우가 평지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곳은 하서 진리항이나 읍천항 보다는 한 단 높은 곳으로 이런 지형을 해안단구라고 합니다. 해안단구가 형성되는 과정에 대하여 토론하고 정리하여 기록하세요.

기수 문제번호 등록일

 

 

체험학습 과제

1

이견대에서 대왕암(문무왕릉)을 찾아 사진을 찍고 이견대에 대하여 설명해보세요.
(대왕암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대왕암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문무왕이 유독 동해바다를 지키겠다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3

‘신라의 3가지 보물’(三寶)가 무엇이고, 문무왕릉과 이견대, 감은사지에 얽힌 호국정신과 효에 대하여 설명해보세요.

기수 문제번호 등록일

 

 

3. 경주 감은사지 - 사적 제31호  

<감은사지>가 위치하는 이곳은 예로부터 동해구(東海口)로 불리던 곳으로, 동쪽에는 문무대왕의 무덤 대왕암이 있고, 앞으로는 토함산에서 발원하여 바다로 흘러드는 대종천(大鐘川)이 있다.

 

* <감은사>에 얽힌 이야기

신라는 당나라와 손을 잡고 백제와 고구려를 통합한 다음 당나라 세력까지 물리친 신라 30대 문무왕에게 남은 문제는 바다를 건너오는 왜구였다. 대규모 군대는 아니지만 시시때때로 쳐들어와 사람과 물자를 약탈해 가는 왜구는 매우 성가시고 귀찮은 존재였다. 이에 문무왕은 부처의 힘을 빌어 왜구를 막겠다는 생각에서 동해 바닷가에 절을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절을 완공하기 전에 위독하게 되자 문무왕은 승려 지의(智義)에게 "죽은 후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지킬 것"을 유언하였다. 이에 따라 화장한 뒤 동해에 안장하였으며 뒤를 이어 즉위한 아들 신문왕이 부왕의 뜻을 받들어 짓다가 중단한 절을 즉위한 이듬해인 682년에 완성시켰다. 그리고 죽은 뒤까지도 나라를 생각하는 문무왕의 은혜에 감사하는 뜻에서 절의 이름을 감은사(感恩寺)라고 하였다.

문무왕 때 짓기 시작한 감은사의 원래 이름은 진국사(鎭國寺)라 불렀다고 하는데, 진국(鎭國)은 진호국가(鎭護國家)의 준말이며, 또한 왜구를 물리치려는 의미인「욕진왜병(欲鎭倭兵)」의 뜻과도 서로 잘 맞는다. 감은사(感恩寺)로 절 이름을 고친 것은 대왕의 별세 후 앞바다에 장사지냈기에 대왕의 은혜를 감축하기 위함이었다고 추정된다.

그러던 어느 날 밤에 신문왕의 꿈에 문무왕이 나타났다. 문무왕은 아들 신문왕에게 "내가 하늘로 승천하게 되니, 네가 바닷가로 와서 나의 승천을 지켜보라" 했다. 그래서 신문왕은 아버지 문무왕이 용이 되어 승천하는 것을 지켜보기 위해 이견대(利見臺)를 지었다.

 

* <감은사>의 가람배치(구조)

감은사지는 1959년~1960년, 1979년∼1980년의 발굴 조사 결과, 중문ㆍ금당ㆍ강당을 남북일직선상에 놓고 금당 전면 좌우에 삼층석탑을 배치한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쌍탑 가람배치로 밝혀졌고 창건 이후 두 차례에 걸친 가람 변천 과정이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가람의 규모는 동ㆍ서 회랑간의 중심거리가 약 70m이고, 중문터에서 강당터까지의 중심거리가 63.7m로서 가람의 외곽선은 거의 정방형에 가깝다. 초석은 금당터의 것은 확실하지 않지만 거의가 방형이며 이 시대의 전형적인 원형 쇠시리를 한 주좌가 있는 초석이다.

감은사지는 종래의 평지가람에서 구릉지 가람으로, 고신라의 일탑 중심의 가람배치에서 쌍탑 일금당(雙塔一金堂) 양식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보이는 초기의 것이다. 즉 동서로 두 탑을 세우고 이 두 석탑 사이의 중심을 지나는 남북선상에 중문과 금당(본존불을 모신 곳), 강당(설법을 하던 곳)을 세운 형태이다. 중문은 석탑의 남쪽에, 금당과 강당은 석탑의 북쪽에 위치한다.

 

* 여기서 잠깐!
신라의 가람 배치(구조)에 대해

불교가 삼국에 전래된 이래 사찰의 구조는 처음에는 1탑 3금당식 이었다. 중앙에 목탑을 세우고 3개의 금당을 세우는 형태였는데 고구려의 1탑 3금당식 구조는 중앙의 목탑을 3개의 금당이 品자 형식으로 에워싼 형태로 모든 금당의 정면은 탑을 바라보는 형상이었다. 신라의 불교는 고구려를 통해 전래되었는데 이때 1탑 3금당식의 가람양식도 함께 전해졌지만 신라에서는 3개의 금당 정면이 모두 탑을 에워싸고 바라보는 형식이 아닌 한쪽 방향을 바라보는 형식이었다. 황룡사의 경우도 3개의 금당이 일렬로 늘어서 남쪽을 바라다보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후 삼국통일기에는 비록 목탑이지만 사천왕사와 망덕사에서 처음 쌍탑이 나타나고 다시 감은사에서는 이 쌍탑이 석탑으로 나타나 통일신라기의 쌍탑 일금당 양식이 정착되었다.

 

*감은사의 독특한 <금당지>

그림

중문과 탑에서 북쪽 정면에 있는 것이 금당이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를 가지 고 있다. 금당 초석 아래 바닥으로부터 석재들이 일정한 높이를 두고 지하공간을 만들고있는데 이것은 문무왕의 ‘해룡(海龍)’에 대한전설과 많은 상관관계가 있을 것이라 추정된다. 기단은 통일신라시대에 즐겨 사용된 가구식 기단으로 2중으로 되어 있다. 기단의 사면 가운데에는 돌계단을 하나씩 만들어 놓았다. 금당의 기단 바깥쪽에는 폭 5.9척 내외의 범위에 걸쳐 무늬가 없는 전을 깔았다. 금당지의 크기는 가로 15.5m, 세로 9m이고 면적은 약 42평이다.

그림

금당의 바닥 장치는 이중의 방형대석 위에 장대석을 걸쳐놓고 그 위에 큰 장대석을 직각으로 마치 마루를 깔듯이 깔고 그 위에 초석을 놓게 한 것이다. 그리하여 장대석 밑은 빈 공간이 되도록 특수하게 만들었다. 한편 이 공간과 기단과의 사이에는 적당히 다듬은 넙적한 돌을 세워서 흙이 안쪽으로 흘러 들어오는 것을 막고 있다. 이 환기시설은 지하공간에서부터 그 위에 다시 넙적한 돌을 덮은 지하통로를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동쪽 통로는『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용이 출입하는 용혈(龍穴)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금당 아래의 지하구조는 우리나라 가람 가운데 <익산 미륵사지>와 <감은사지> 딱 두 곳에만 발견된다.

그림

금당의 경우 특이한 또 하나는, 돌로 석축을 쌓는 일반적인 양식과는 달리 돌로 판석을 다듬어 세웠다는 점이다. 이러한 건축기법 또한 미륵사와 감은사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라 한다.

금당터 앞의 석재 중에 태극무늬와 기하학적인 무늬가 새겨진 것이 눈에 띄는데 언뜻 보기에도 예삿돌은 아니다.

 

*용(龍)이 드나들던 -<용담, 용혈>

중문의 남쪽은 매우 낮아 석축으로 쌓았는데, 대단히 정교하게 쌓았으며, 특히 못 모양의 부재(돌못)를 이용하고 있는 점에서 볼 때 단순히 가람의 남쪽 끝을 막는 기능만을 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 석축의 바깥으로는 대종천의 물이 지금보다 많았다면 배를 타고 이 절에 이르는 통로의 구실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이 석축의 바깥으로는 현재 못이 하나 남아 있다. 이를 <용담>이라 부르는 데, 신라 당시 감은사가 대종천변에 세워졌고 또 동해의 용이 드나들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이 못이 대종천과 연결되었을 것이다.

또한 동해안은 융기해안이므로 신라시대에는 바닷물의 수위가 지금보다 높았을 것이므로 충분히 용담 연못의 물과 대종천 그리고 바닷물이 연결되었을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감은사지 삼층석탑>에 대해- 국보 제112호.전체 높이 13.4m

그림

절터의 금당 앞 좌우에 서 있는 2기의 탑은동서의 쌍탑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동서 두탑은 전체적인 형식과 구조는 말할 것도 없고각 부재의 치수까지도 같다. 다만 상하층 기단 부재모양에 있어서 약간 차이가 있을 뿐이다. 화강암 이중기단 위에 응회암질의 방형중층 탑신을 올린 삼층석탑으로 규모면에서신라 최대의 석탑이다. 기단부와 탑신부가 거의 완전하게 남아있고 상륜부 노반 위는 결실되어 없어진지 오래이지만 찰주가 남아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감은사는 682년(신문왕 2)에 창건되었는데, 이 탑의 건립연대도 역시 같은 시기로 추정된다.

하층기단의 지대석과 면석이 같은 돌로 된 12장의 석재로 구성되어 있고, 각 면에는 양쪽 우주(모서리 기둥)가 있는 외에 탱주(버팀기둥)가 3주씩 있다. 갑석도 역시 12장의 석재로 짜여 있으며 갑석 중앙에는 호형(弧形)과 각형(角形)의 2단 굄이 있다. 상층기단은 면석이 12장의 석재로 조립되어 있으며 갑석은 8매로 구성하였다. 각 면에는 양쪽 우주가 있는 외에 탱주가 2주씩 있다.

그림

탑신부의 옥신(몸돌)과 옥개석(지붕돌)은 각 부마다 4∼8개의 석재로 구성되어 있고, 그 내부에는 적심석으로 메워져 있으나, 제3층 옥신만은 석재가 하나인데 이것은 규격이 작은 원인도 있겠으나 사리장치를 하기 위한 방편으로도 볼 수 있다. 초층 옥신은 네 모서리의 우주와 그 사이의 면석들을 따로 만들어 맞추어 세웠으며, 제2층 옥신은 각각 한쪽에 우주를 하나씩 모각한 판석 4장으로 조립되어 있고, 1장으로 조성된 제3층 옥신에는 각 양쪽의 우주가 정연하다. 옥개석은 낙수면(지붕돌 윗면)) 부분과 받침 부분을 별개의 돌로 조성하되 각각 4장으로 짜여 있다. 옥개받침(지붕돌 아랫면)은 각 층 5단씩이며, 낙수면 정상에는 2단의 높직한 굄이 있으며 낙수면 끝은 약간 위로 들려져 있다.

상륜부는 제3층 옥개석 위에 1장으로 만들어진 노반석이 남아 있고, 그 이상의 부재는 없어졌다. 현재는 약 3.9m 높이의 쇠로 된 찰주가 노반석을 관통하여 탑신부에 꽂혀 있을 뿐이다. 노반 이상에 보이는 찰주의 중간부분에 가공한 흔적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상륜부는 모두 석재 구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이 석탑은 상하기단과 탑신부에 꽂혀 있을 뿐이다. 노반 이상에 보이는 찰주의 높이가 3.5m, 그 이하로 제3층 옥개석의 중심에 꽂힌 부분이 약 1.3m이다. 이 찰주의 중간부분에 가공한 흔적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상륜부는 모두 석재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감은사지 석탑은 상하기단과 탑신부의 각 면에 우주와 탱주가 모각되어 있고 낙수면이 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전각에서 추녀가 위로 들려지는 등 목조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수평을 이루고 있는 추녀 밑 부분과 층단을 이루고 있는 받침 등의 석탑양식은 이후 우리나라 석탑의 전형 모델로 정립되었다. 즉 감은사 탑은 고선사의 삼층석탑 등과 함께 이후 우리나라 석탑의 정형을 이끈 탑이라 할 수 있다.

탑의 완성도를 결정하는 것은 안정감과 상승감이라는 두 가지 요소인데, 이 두 요소는 서로 상충된다. 고구려, 백제의 탑처럼 5층, 9층으로 세우면 상승감은 해결되지만 신라 석탑의 전형은 3층이므로 상승감에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신라 석탑은 1층 탑신(몸돌)을 높게 하고 층수에 포함되지 않는 2중 기단을 세워 상승감과 안정감을 동시에 해결하였다. 신라인의 뛰어난 창의력이라 할 수 있다.

감은사지 삼층석탑은 바로 이 두 가지 측면에서도 성공을 거두고 있다. 즉 3개의 몸돌이 4:3:2의 비례로 상승감에 성공하고 있는데, 실제 높이는 4:3:2가 아닌 4:2:2 이다. 곧 1층 몸돌이 2, 3층에 비해 월등히 높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의 눈높이에서 보는 착시를 감안한 것으로 만약 정상적인 체감률을 따랐다면 지금과 같은 상승감을 보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림

<감은사지 삼층석탑 체감각도>

 

*<감은사지 西삼층석탑> 내 유물(보물 제366호)

그림

그림

1959년 12월 31일 서쪽에 있는 석탑을 해체ㆍ수리하다가 3층 탑신에서 발견한 사리장엄구(사리갖춤) 등을 사진으로 감상해 보자. 이들 관계 유물들은 조성연대와 발견 장소가 확실한 몇 안 되는 유물중의 하나이다.

 

* <감은사지 삼층석탑>東삼층석탑 내 사리장엄구(보물 제1359호)

7세기 신라 도금기술과 공예기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금동사리함 등 자료들을 사진으로 감상해 보자..

그림

<감은사지 동탑 금동사리외함>

 

그림

<은사지 동탑 금동사리내함>

 

그림

<수정 사리함과 사리>

 

그림

<감은사지 동탑 출토 사천왕상과 스님상, 사자상>

 

 

체험학습 과제

1

동, 서 탑이 함께 보일 수 있는 위치에서 사진을 찍고, 감은사지가 만들어진 유래에 대하여 설명해보세요.

2

이 탑이 삼층석탑인 것을 탑의 구조와 함께 설명해보세요.

3

신라 제 30대 문무왕이 한 일에 대하여 토론하고 설명해보세요.

기수 문제번호 등록일

 

 

4. 경주 불국사 - 사적 제502호  

751년(경덕왕 10)에 김대성(金大城)의 발원으로 창건하였다. 그러나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 의하면, “이차돈이 순교한 이듬해인 528년에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迎帝夫人)과 기윤부인(己尹夫人)이 이 절을 창건하고 비구니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574년에는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부인(只召夫人)이 이 절을 중창하고 승려들을 득도하게 하였으며, 왕의 부인은 비구니가 된 뒤 이 절에 비로자나불상과 아미타불상을 봉안하였다”고 한다. 이들 기록에는 신라 불교의 역사를 통해서 볼 때 많은 모순이 있으므로 당시의 불국사가 대규모는 아니었지만, 대웅전과 무설전을 갖춘 사찰이었을 가능성은 엿볼 수 있다.

불국사가 대찰이 된 것은 김대성에 의해서였다. 『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현세의 부모를 위해서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절은 751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774년(혜공왕 10) 12월에 그가 생애를 마칠 때까지 완공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 뒤 국가에서 완성시켰다.

따라서 이 절은 김대성 개인의 원찰(願刹)이라기보다는 ‘국가의 원찰로 건립되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준공 당시 이 절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일곽 등 5개의 구역으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대웅전, 극락전, 비로전, 관음전, 지장전 등을 중심으로 한 구역이다.

김대성이 중창한 뒤 이 절은 9차례의 중창 및 중수를 거쳐 임진왜란에 까지 이른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불국사가 불타게 되자 난을 피하여 장수사(長壽寺)에 있었던 담화(曇華)가 문도를 이끌고 불국사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이미  모두 불타버린 뒤였고, 금동불상과 옥으로 만든 물건과 돌다리와 탑만이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때 타버린 목조건물들은 20년이 지난 뒤부터 점차 복구되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일곽의 경우, 해안(海眼)이 1612년 경루와 범종각과 남행랑 등을 복구하였고, 1630년에는 태호(泰湖)가 자하문을 중수하였으며, 1648년에는 해정(海淨)이 무설전을 복구하였다. 대웅전은 1659년 천심(天心)이 경주부윤의 시주를 얻어 중건하였다. 이 밖에 안양문·극락전·비로전·관음전·나한전·시왕전·조사전만이 이때 중건되었을 뿐 나머지는 복원되지 못하였다.

그 뒤 또다시 퇴락되어 가던 이 절은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의 발원으로 나라에서 중창하였다. 이때의 대복원공사를 위하여 1969년에는 문화재위원들의 발굴조사가 진행되었고, 1970년 2월에 공사를 착공하여 준공하였다. 당시까지 유지로만 남아 있던 무설전·관음전·비로전·경루·회랑 등은 이때 복원되었고, 대웅전·극락전·범영루·자하문 등을 새롭게 단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체험학습 과제

1

불국사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곳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느낌을 말해보세요.

2

불국사의 “불국”이란 무슨 뜻이고 언제, 누가, 무엇을 위해 만들었는지 설명해보세요.

3

불국사의 석축의 특징과 “그랭이 공법”, 지진과의 연관성에 대해 토론하고 설명해보세요.

기수 문제번호 등록일

 

 

6. 경주 불국사 다보탑 - 국보 제20호  

그림

국보 제20호이며, 불국사 대웅전 앞뜰에 석가탑과 함께 나란히 서 있다. 다보탑과 석가탑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견보탑품」에 근거하여 건립되었다고 한다. 즉 다보여래가 『법화경』을 설법하는 석가모니를 찬양하기 위해 보탑의 형상으로 솟아나 공중에 머물며 찬양한 후, 탑 안의 자리를 반으로 나누어 나란히 앉았다는 내용이다. 『불국사 사적기』에는 다보탑을 다보여래상주증명탑으로, 석가탑을 석가여래상주설법탑으로 지칭한다.

이 석탑은 이중기단에 삼층의 탑신을 지닌 신라의 전형석탑과 전혀 다른 형태를 지니고 있어 이형 석탑의 백미로 평가받고 있다. 탑의 층수에 대하여는 사각의 옥개석, 팔각의 옥개석을 사이에 두고 사각, 팔각난간을 별도의 층으로 해석하는 등 여러 가지 해석으로 1층설, 2층설, 3층설, 4층설 등 다양하다. 기단은 방형 평면을 기본으로 사방에 계단을 두어 전체적인 평면이 ‘亞’자 모양을 하고 있다. 계단에는 본래 난간이 가설되었던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확인할 수는 없다. 계단 윗부분 갑석 모서리에는 4마리의 사자가 배치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1마리만 남아 있다.

탑신은 사각의 옥개석과 팔각의 옥개석을 중심으로 상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팔각 옥개 처마 아랫면에는 물끊기의 기능을 하는 홈이 있다. 상륜은 노반, 복발, 앙화, 보륜, 보개, 보주가 남아 있다.

불국사 다보탑은 조형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통일신라 석조미술의 백미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다보탑은 석가여래와 다보여래의 만남을 현실공간에 탑으로 재현했을 뿐 아니라 경전에서 말하는 탑의 형태를 독창적 예술로 승화시킨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체험학습 과제

1

석가탑 앞에서 다보탑이 함께 나오도록 사진을 찍고, 느낌을 말해보세요.

2

석가탑과 다보탑, 범영루와 좌경루의 미적 조화에 대하여 토론하고 설명해보세요.

3

석가탑을 일명 무영탑이라고 합니다. 무영탑의 의미와 그런 다른 이름을 가지게 된 연유를 알아보고, 토론하여 기록하세요.

기수 문제번호 등록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