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코스 : 서남산과 왕경

[제2코스]신라의 탄생과 종말의 역사가 서려 있는 길 !!! 서남산과 왕경

  • 화랑교육원~10 경북산림환경연구원[20]⇒20 삼릉주차장~10 경애왕릉[10]~3 삼릉[10]~10 머리 없는 석조여래좌상[7]~3 마애관음보살상[7]~10 선각육존불[10]~20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15]~5 (태진지)~5 지마왕릉[7]~10 포석정[20]~20 창림사지 삼층석탑[15]~10 남간사지 당간지주[10]~15 나정[10]~15 오릉[20]~15 천관사지[10]~10 (교촌마을)~5 월정교[5]~5 최부자댁[15]~5 향교[10]~5 계림[10]~7 첨성대[15]~5 월성[10]~10 석빙고[10] ⇒15 화랑교육원

※ 도보 ~분 / 차량 ⇒분 / 유적지 내 체류 시간 [  ] / 중식 장소 밑줄

지도

답사 개요

  • <경주남산>은 어떤 곳인가?
신라 왕경과 남산(사진 중간 지점이 반월성

<신라 왕경과 남산(사진 중간 지점이 반월성)> - 오세윤 촬영
남산은 경주 벌 깊숙이 들어와 앉은 산으로서 남산 끝자락에 신라의 궁궐인 반월성이 자리하며, 그 가까이에 천마총, 첨성대, 안압지 등이 있고, 남산 안에는 150개의 절터가 분포한다. 남산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신라 천년의 역사와 예술이 남산의 자연에 잘 어울려 알알이 박혀 있다는 것이다. 남산은 경주의 진산(鎭山)이다. 北의 금오봉(468m), 南의 고위봉(494m)을 중심으로 동서 4km 남북 10km되는 타원형의 산으로, 골은 깊고 능선은 변화무쌍하며 기암괴석이 만물상을 이루어 작으면서도 큰 산이다. 남산은 신라의 흥망성쇠를 함께 해온 역사의 산이며 온갖 전설이 박혀있는 전설의 보고(寶庫)이다. 박혁거세의 탄생지, 첫 궁궐터, 망국의 비극이 서린 포석정, 도성을 지켜온 산성(山城)과 왕릉 등 수백의 유적이 산에 가득하다 불교가 들어온 후로 골마다 절이 세워지고 바위마다 불상이 조성되며 수많은 탑이 세워져 신라인의 신앙과 예술이 남김없이 여기에 표현되니, 자연과 예술이 조화된 유적지로 세계에 그 유례가 없다 할 것이다. 신라 사람들은 경주 남산을 서방정토(西方淨土) 불국(佛國)의 산, 신성한 영산(靈山)이라 여겼다. 남산은 그 자체가 신라 사람들의 신앙지였으므로 골짜기와 능선과 봉우리마다 신라인들의 손길이 깃들어 있다. 현재 확인된 유물, 유적은 절터 154개소, 탑 96, 불상 118기 등 거의 700점이 넘는 유적(유물)이 있어, ‘노천박물관’이라 불릴 만하다. 남산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신라 천년의 역사와 예술이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어울려 산 전체에 펼쳐져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남산의 유적들은 각각 따로 보아서는 아니 되고, 전체의 유적을 연결하여 보아야 한다. 곳곳에 배어있는 조상들의 숨결을 느끼며 남산을 오르는 일은 조상의 얼을 배우는 최고의 문화 체험이라 할 것이다. 남산에 있는 불교 유적의 가치는 자연과의 조화와 다양성에 있다. 절과 불상, 탑을 세우되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면서 조성하였다. 자연과 예술이 조화되어 산 전체가 보물이니 세계에 그 유례가 없다.

<서남산>유적의 역사적 의미

  • 남산에는 신라의 역사가 시작되는 곳임과 동시에 신라가 망해가는 비운의 현장도 남아있어 역사적으로 중요한 곳이다. 남산의 서쪽에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왕이 탄생하셨다는 나정이 있고, 처음 궁궐터라는 창림사터가 있으며, 그 옆으로 경애왕이 견훤의 침입으로 비운을 맞이한 포석정이 자리하고 있다.
삼릉골 유적지 약

‘마애불’의 계곡 - <삼릉골> 답사

  • 삼릉골은 골이 깊고 기암괴석과 변화무쌍한 능선이 발달되어 남산의 여러 골짜기 중 가장 자연 경관이 수려하다. 삼릉골은 16구의 가장 많은 불상이 있는데 옆 골짜기의 불상까지 합치면 24구의 불상 조각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삼릉과 경애왕릉 주변의 넓은 노송 숲은 우리나라의 좋은 숲으로 선정된 명소이기도 하므로 남산의 많은 답사 코스 중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코스이며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어 남산의 입구처럼 여겨지는 곳이다.

유의 사항

  • 도로를 횡단하거나 따라 걷는 경우가 있으므로 교통규칙을 잘 지키고, 안전에 유의하도록 특히 주의합니다.
  • 점심과 물과 간식을 반드시 준비합니다.
  • 풀숲을 통과할 수도 있으므로 운동화에 긴바지를 착용합니다.
  • 유적 유물을 훼손하지 않도록 주의하여 관찰합니다.
  • 의문은 인터넷이나 해설사를 이용하여 해결하도록 합니다.
  • 몸에 문제가 있을 때는 재빨리 인솔교사에게 말씀드려 해결합니다.
  • 발굴현장에서는 책임자의 허락을 받은 후에 관람합니다.

 

1. 경상북도 산림환경연구원  

http://www.kbfoa.go.kr/?r=home

경북산림환경연구원은 1907년 4월 한국경영 묘포장으로 출발하여 1910년 경상북도 소속으로 변경되었으며, 1931년에는 경상북도 임업시험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해방 후 1961년에 농촌진흥원 임목양묘장으로 이름이 바뀌고, 1969년에는 경주시 배반동 현재의 위치로 옮겨왔다. 1993년 경상북도 산림환경연구소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2008년 현재의 이름으로 다시 바뀌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곳 연구원은 기후변화에 대응한 산림환경조사, 산림병해충의 친환경 방제, 유망 임산물의 소득화 연구, 산림의 효율적인 경영과 보호를 위한 임도 및 사방사업을 수행하는 산림 전문 연구기관입니다. 또한 야생화원, 무궁화동산, 산림전시실, 습지생태원 등 오랜 세월 가꾸어 온 아름다운 산림자원을 바탕으로, 해마다 약 30만 명 가량이 산림문화를 찾아 즐기는 쉼터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숲 해설 프로그램과 유아 숲 체험원도 운영하고 있다.

체험학습 과제

1

1-1. 꽃이 피어 있는 식물 옆에서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경북산림환경연구원’에 대한 느낌을 설명해 보세요.

2

꽃이 피어있는 식물 3종류의 사진을 찍고, 이름을 검색하여 기록하세요.

3

나무 세 종류를 선택하여 이름을 적고, 잎과 나무줄기의 특징을 기록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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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경주 경애왕릉  

(사적 제222호)

신라 55대 왕 경애왕릉

<신라 55대 왕 경애왕릉>


신라 55대 왕인 경애왕(재위 924∼927)의 무덤으로, 경명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 기록의 기록에 의하면, 재위 4년이 되던 해에 포석정에서 잔치를 베풀고 있을 때, 후백제 견훤의 습격을 받아서 최후를 마친 왕이다. 무덤은 삼릉계곡 입구의 소나무 숲 안에 있으며, 별다른 특징은 없다. 신라 왕릉으로는 빈약한 편이며 발굴된 적은 없다. 『삼국사기』에 경애왕을 남산 해목령에 장사지냈다고 되어있는데, 기록대로 라면 해목령 가까이에 있는 지금의 일성왕릉을 경애왕릉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체험학습 과제

1

1-1. 경애왕릉과 주변 소나무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경애왕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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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경주 배동 삼릉  

(사적 제219호)

경주삼릉

이 계곡(일명 냉골) 입구에 동서로 3개의 왕릉이 나란히 있어 삼릉이라고 한다. 제일 앞에 있는 것이 54대 경명왕(景明王)(917-924) 능이고, 가운데 것이 53대 신덕왕(神德王)(912-917) 능이다. 맨 뒤의 것이 8대 아달라왕(阿達羅王) 능이라 전하고 있다. 경명왕릉의 둘레는 52.5m이고, 신덕왕릉의 둘레는 63m이며 아달라왕릉의 둘레는 41.6m로서 신라 왕릉으로서는 모두 규모가 작은 편에 속하는 능들이다. 무덤은 모두 원형으로 흙을 쌓아올린 형태를 하고 있다.

아달라왕

아달라왕(재위 154∼184)은 일성왕의 태자로 신라 8대왕에 즉위하였고 30년간 재위하였다. 키가 7척으로서 기골이 장대하고 콧마루가 우뚝하며, 특이한 용모에 위엄이 있어 모두가 경의를 보냈다. 왕 3(156)년 계입령(鷄立嶺, 조령)을 통해 충주에 이르는 도로를 만들고 158년 조령의 길을 닦았다. 156년 아찬(17관등 중 여섯째) 길선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백제로 달아나자 왕은 그의 송환을 요구하였다. 백제에서 이를 응하지 않아 두 나라 사이가 나빠졌다. 167년 백제가 신라 서쪽의 두 성을 격파하고 1천여 명의 백성을 잡아가자 왕이 1만 명 또는 2만 명의 군사와 기병을 이끌고 전장에 나가니 백제는 포로들을 석방하고 화친을 청하였다. 174년에는 왜국에 여왕 비미호(卑彌乎: 히미꼬)가 사신을 보내왔다고 한다. 능의 크기는 밑둘레 58m, 높이 5.4m, 지름 18m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아달라왕 때에 연오랑과 세오녀에 관한 설화가 전해 온다.

신덕왕

제52대 효공왕이 자손이 없이 죽자 백성들이 아달라왕의 원손(세대가 먼 자손)이며, 제49대 헌강왕의 사위인 신덕왕(재위 912∼917)을 제 53대 왕으로 추대하였다. 견훤과 궁예의 침입이 있어 싸움에 진력하였다. 장지는 죽성(竹城: 위치 미상)이라고도 하고, 혹은 화장하여 잠현(箴峴)에 묻었다고도 한다. 능의 크기는 밑둘레 61m, 높이 5.8m, 지름 18m이다. 두 차례에 걸쳐 도굴을 당하여 1953년과 1963년에 내부가 조사되었다. 조사 결과 매장주체는 깬 돌로 쌓은 횡혈식 돌방으로 밝혀졌다

경명왕

제54대 경명왕(재위 917∼924)은 신덕왕의 맏아들 태자이며 왕비는 석씨(昔氏)로 모두 9명의 아들을 두었다. 후삼국이 패권을 다투던 때에 왕위에 올라 기울어가는 국운을 건지려고 후당(後唐)에 조공을 바치며 구원을 청하였으나 실패했다. 실제 신라 왕실은 왕경인 경주를 중심으로 하는 주변 지역을 다스리는 데 불과하였고, 나머지는 국토는 궁예와 견훤 등 지방 세력에게 빼앗겨 갔다. 918년에 일어난 현승의 반란으로 신라의 운명은 더욱 재촉하게 되었다. 태봉의 궁예가 인심을 잃어 왕건이 추대되고 궁예는 도망가다가 피살되었다. 왕건은 연호를 천수(天授) 원년이라 칭하였고 3년(919년)에는 고려의 태조 왕건이 수도를 송악으로 옮겼다. 4년(920년)에 경명왕은 고려 태조 왕건과 사신을 교환하고 우호를 닦았다. 이 해 10월에 견훤이 보병과 기병 1만을 거느리고 대야성(합천)을 공격하자 경명왕은 아찬 김률을 고려로 보내어 왕건에게 군사 원조를 요청하였고, 왕건이 부장을 시켜 구원하도록 명령하였다. 그 뒤 왕건과 견훤이 패권을 다투게 되었으나, 이들의 패권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이들과 신라 왕실과의 연결이었다. 따라서 안동이나 합천 지역에서 이들의 패권 다툼이 치열하였으나 싸움은 결국 해상권을 장악한 왕건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924년에 왕이 죽으니 시호를 경명이라 칭하고 황복사 북쪽에 장사하였다. 고려 태조 왕건이 사신을 보내어 조문하였다. 또한, 경명왕 때에는 여러 가지 변괴가 있었다고 전한다. 919년 사천왕사 벽화의 개가 울었고, 927년 황룡사탑 그림자가 사지(舍知) 금모(今毛)의 집 뜰에 열흘이나 머물렀으며, 사천왕사 오방신의 활줄이 모두 끊어지고 벽화의 개가 뜰로 쫓아 나왔다는 기록들이 남아있다. 이러한 기록의 이면을 생각해 볼 때, 당시 신라의 국운이 기울어져가는 불안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도굴된 신덕왕릉의 구조

신덕왕 석실의 단면도

제53대 신덕왕릉은 1963년 7월에 도굴되어 조사․보고된 일이 있어서 신라왕릉과 석실분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구조를 보면 할석으로 쌓은 석실분으로 평면이 정방형에 가깝고 남벽 중앙에 비교적 긴 이중의 연도가 달렸는데 천정이 재래식 굴뚝처럼 높이 올라간 형식이다. 현실 내에는 연도와 직각되게 넓고 높은 관대를 만들고, 그 위에 긴 판석 2매를 놓아 시상(屍床)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북벽과 연접한 동․서벽에 연도 천정 높이 만하게 장방형 구획을 만들고 상하로 나누어 백․황․주․청색을 칠함으로써 마치 병풍을 둘러친 것과 같은 효과를 내었다.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러한 점에서 신덕왕릉의 구조는 통일기 전후의 고분임을 짐작할 수 있다. 아달라왕과 신덕왕은 서로 700년이란 시간적인 거리가 있어 같은 박씨들의 왕릉으로 보기 어렵다.

서남산 자락의 왕릉이 모두 박씨 왕릉인 이유

왜 서남산에 있는 왕릉은 모두 박씨 성을 가진 왕의 능일까? 조선시대 경주부 망성리에 살았던 선비인 화계 유의건이 남긴 <화계집>이란 문집이 있다. 이 문집 안에 ‘신라왕릉진안설’이라는 내용이 있는데 이에 따르면, 조선 영조 6년 경술년(1730)에 경주부윤으로 있던 김시형이 박씨 문중과 타협하여 전하는 장소를 잃어버린 왕릉을 찾는 작업을 행하였다고 한다. 당시 양 문중은 남산을 기준으로 하여 동남산에 위치하고 있는 능들은 김씨 왕의 능으로 하고 서남산 일대에 있는 능들은 박씨 왕의 능으로 하였다. 이 작업으로 경술년 이후에 등장한 왕릉은 모두 17기로 그 이전의 11기를 포함 28기의 능이 전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정부에서 사적으로 지정한 것들은 영조 당시 나타난 왕릉을 그대로 받아들여 지정한 것으로 학계의 고고학적 검토 없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17기의 왕릉들 앞에는 작은 능표석이 서 있는데, 이것들은 거의 조선 영조 때의 것이다. 현재 서남산 자락에 있는 왕릉은 모두 박씨 성을 가진 왕의 능으로 지정되어 있다. 오릉에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왕과 2대 남해왕과 3대 유리왕과 4대 파사왕, 그리고 6대 지마왕, 7대 일성왕, 이곳 삼릉에 있는 8대 아달라왕과 53대 신덕왕과 54대 경명왕, 그리고 삼릉 바로 남쪽에 묻힌 55대 경애왕의 능으로, 박씨 왕 10명의 능이 모두 서남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무덤의 호칭

  • 임금이나 왕비의 무덤으로 주인을 알고 있을 때 사용하는 말.
    예) 무열왕릉, 선덕여왕릉 등
  • 고 분 주인이 알려진 왕릉이나 왕비릉을 제외한, 통일신라시대 이전의 재배층의 무덤을 일컫는 말.
  • 왕릉으로 추정되지만 무덤의 주인을 알 수 없어 고분에서 대표적인 유물이나 대표성을 사용하여 붙이는 말.
    예) 금관총, 천마총, 무용총, 장군총 등

체험학습 과제

1

1-1. 3기의 능이 잘 나타나는 위치에서 사진 을 찍어 보세요.
1-2. 삼릉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2-1. 삼릉에 묻힌 왕은 누구이고 성씨는?
2-2. 삼릉에 묻힌 왕의 실제 무덤이 아니라 고 의심되는 점을 말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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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경주 삼릉계곡 머리 없는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666호)

삼릉골 입구에 있는 머리 없는 석불좌상 삼릉에서 계곡으로 약 300m쯤 들어가면 길 옆 바위 옆에 머리 없는 좌불이 앉아 있다. 현재 높이가 1.6m 되고, 무릎 나비가 1.56m 되는 큰 불상이다. 계곡에 묻혀 있던 것을 파내어 이곳에 앉혀 놓은 것인데 양쪽 무릎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두 손 모양도 알 수 없게 되었다. 편안히 앉은 자세이며 기백이 넘치는 가슴이며 넓은 어깨 등 신라 전성기의 위풍당당한 불상이다. 특히 왼쪽 어깨에서 가사(袈裟) 자락을 매듭지어 무릎 아래로 드리워진 두 줄의 가사 끈의 수실은 사실적으로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특색 있는 장식품의 하나인 매듭은 신라 시대부터 발달되어 있었다는 것을 이 가사 끈의 매듭으로 알 수 있다. 아래쪽의 동여맨 끈도 같은 방법으로 매듭지어 놓았는데 이 불상은 용장사의 삼륜대좌의 불상과 같이 가사 끈을 드리우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 하겠다. 삼릉골을 오르면서 처음으로 만나는 이 불상은 머리가 없기 때문에 어쩌면 오히려 인상 깊게 다가온다. 왜 머리가 없을까라는 의문을 가지면서 애처로움과 함께 오랜 역사를 느끼기도 한다.

체험학습 과제

1

1-1. 석조여래좌상의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석조여래좌상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머리가 파손된 이유와 느낌을 말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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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경주 삼릉계곡 마애관음보살상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호)

경주 삼릉계곡 마애관음보살상

머리 없는 석불좌상에서 북쪽 산등성이를 바라보면 뾰족한 바위들이 높고 낮게 솟아 있는데 그 중 한 바위에 미소를 머금고 있는 관세음보살입상이 새겨져 있다. 풍만한 얼굴은 미소를 머금었고 오른손은 설법하는 손 모양(설법인)을 하여 가슴에 들고 왼손은 아래로 드리운 채 감로수병(정병)을 들고 있다. 머리에 쓴 보관에는 화불을 배치하여 관세음보살임을 표시하였는데 목걸이와 팔지 등 여러 가지 장신구들로 화려하게 몸을 꾸몄다. 이 불상이 진정 아름다운 밝은 표정을 지어 보이는 순간은 석양의 해질 무렵이다. 단풍이 드는 가을의 석양 때가 더욱 좋다. 여러 서 있는 바위들은 관음을 호위하는 것 같고 높은 곳에 위치하여 보타낙가산(관음이 유하신다는 山)에서 내려오고 있는 분위기이다.

<관세음보살>은?

아미타여래의 사랑을 받들어 세상을 구하시는 보살이다. 정성으로 그 이름을 부르면서 구원을 청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거나 그 소리를 들으면 곧 와서 구원의 손길을 뻗쳐 준다고 한다. 관세음보살의 위력은 매우 커서 관세음보살을 믿는 사람이 불 속에 들어가더라도 불이 그를 태우지 못하고, 큰물에 빠졌다 하더라도 그 이름을 부르면 얕은 곳이 찾아진다고 한다. 이렇게 큰 위력을 가진 관세음보살은 신라시대뿐만 아니라 근세에까지도 많이 조성되어 왔다.

여기서 잠깐! 상식 알아보기(불상 용어)

  • 좌상 : 앉아 있는 모습의 조각상
  • 입상 : 서 있는 모습의 조각상
  • 와상 : 누워있는 모습의 조각상
  • 마애불 : 바위 면에 새겨진 불상(돋을새김이나 선각)

체험학습 과제

1

1-1. 마애관음보살상의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마애관음보살상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이 불상이 관음보살이라는 근거를 말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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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경주 삼릉계곡 선각육존불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1호)

경주 삼릉계곡 선각육존불

마애관세음보살상에서 약 100m 정도 계곡으로 더 올라가면 두 개의 계곡이 합쳐지는 곳에 절벽이 펼쳐져 있는데, 서쪽 벽면에는 아미타삼존상을 새겼고 동쪽 벽면에 석가삼존상을 새겨 모두 6분의 조각상이 있다. 다듬지 않은 자연 바위 위에 자유로운 필치로 그린 그림을 선각으로 새겼으니 조각이라기보다는 그림이라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늠름한 필치는 능숙한 필력을 보여주고 있다. 동쪽 벽면에 새겨진 삼존불 중 석가여래는 넓은 연꽃 위에 앉아 있고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양 옆에 서 있다. 여래상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편단우견으로 가사를 입고 오른손은 설법인을 표시하여 가슴에 들고 왼손은 무릎 위에 선정인으로 놓여 있다. 둥근 원으로 두광과 신광을 나타내었는데 단숨에 그려진 유창한 곡선은 시원스럽다.
왼쪽의 문수보살은 마멸이 심하여 모습을 잘 알 수 없으나 연꽃 위에 서서 오른손은 설법인으로 가슴에 들고 왼손은 아래로 드리운 채 천의 자락을 잡고 있는 듯하며 얼굴은 여래 쪽으로 돌리고 있다. 오른쪽의 보현보살은 손등을 밖으로 하여 손끝을 아래로 드리우고 연꽃 위에 서 있다. 두 보살은 모두 커다란 세 개의 구슬을 꿴 목걸이와 팔과 손목에 팔찌를 끼었을 뿐 상의는 입지 않았다. 두 보살이 여래상 쪽으로 비스듬히 향하고 서 있으므로 바위의 분위기는 아늑하게 통일되어 있다. 서쪽의 아미타 삼존은 석가 삼존과는 달리 여래가 연꽃 위에 서 계시고 양쪽 협시보살은 연꽃 위에 무릎을 꿇고 있다. 여래는 오른손 바닥을 아래로 하여 가슴에 들고,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하여 배 앞에 들고 있다. 가사는 우견편단으로 입었는데 신광은 없고 두광만 둥근 원으로 나타나 있다. 왼쪽의 관세음보살은 여래 쪽으로 향해 왼쪽 무릎을 꿇고 있고, 오른 쪽의 대세지보살은 관세음보살과 반대의 모습으로 앉아 역시 꽃 쟁반을 받들고 있다. 두 보살은 모두 둥근 구슬 목걸이를 걸었고 팔과 팔목에 팔찌를 끼었고 어깨에는 천의를 걸쳤다. 여래가 앉아 계시고 협시보살이 서있는 예는 있지만, 여래가 서고 협시보살이 앉아 있는 예는 극히 드물다. 이 조각들은 바위를 다듬지 않고 자연 바위 위에 선각으로 새겼으므로 한층 더 신성하게 느껴진다. 바위 위에는 홈을 파서 흐르는 빗물이 벽면을 적시지 못하게 물길을 돌려놓았다. 많은 기와 조각들이 흩어져 있고 바위 위에 기둥 자리도 보이므로 옛날에는 이 바위 위에 지붕이 덮여 있었던 것 같다.

체험학습 과제

1

1-1. 서쪽의 아미타삼존상과 동쪽의 석가 삼존상 중 하나의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선각육존불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선각육존불’이라는 명칭의 의미에 대해 말해 보세요.

3

이 불상에 지붕 시설을 했다는 근거를 찾아서 말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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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경주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  

(보물 제63호)

배리삼존불의 중요한 특징 : 천진한 미소

배리삼존불의 천진한 미소

삼불사 경내의 맞배지붕 보호각 속에 3구의 불상이 나란히 모셔져 있다. 움직이는 햇 살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는 신비한 미소로 유명한 배리 삼존불 입상은 보물 제 63 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삼국시대 석불을 대표하는 아름다운 불상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삼존불상은 원래 이곳 동쪽 계곡 절터에 흩어져 누워 있던 것을 1923년 10월 한 곳에 모아 세워놓은 것이다. 삼존불은 모두 입상인데, 가운데 불상은 높이 2.6m로 평평한 받침돌 위에 서 있는 비교적 큰 불상이다. 얼굴은 전체적으로 풍만하고 우아하며 입가의 미소가 뛰어난 석불로 얼핏 보면 명랑하고 천진스러운 어린아이들처럼 보인다. 이는 불상의 키가 머리 길이의 5배로 아기들 키와 같은 비례로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이 삼존불의 미소와 손의 모습, 몸의 체감 비율, 옷 무늬를 처리한 방식들로 현재 남산에서 옮겨져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 삼화령 석조미륵삼존불좌상(일명 애기 부처)을 떠올리게 한다. 아쉬운 점은 비바람으로 인한 마멸을 줄이기 위해 설치한 보호각으로 인해 이제는 배리삼존불의 미소를 잘 볼 수가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코가 어디로 갔을까?

지금이야 그럴 일 없겠지만, 한 때는 돌부처의 코를 갈아 마시면 남자아이를 잉태한다 하여 석불의 코가 수난을 당하였고, 과부나 처녀가 임신을 하면 낙태한다 하여 석불의 귀를 갈아 마시는 수난을 당하였다. 무지한 미신의 소치와 배타적 종교의 그릇된 생각이 선조들의 유산을 훼손하였다. 이곳의 석불 역시, 코가 없거나 희미한 형체로만 남아 있다.

부처의 손 자세(수인(手印)) : 시무외인, 여원인

시무외인, 여원인

중앙에 계시는 아미타여래상은 풍만한 얼굴에 크게 반원을 그린 눈썹이 깊이 패어졌고 그 밑에 눈두덩이 부풀어 올라 가느스름한 눈자위에 그늘을 지우면서 두 눈이 천진스럽게 웃음 짓고 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짧은 코 아래 두툼한 입술과 오동통한 두 뺨에는 화사한 미소가 피어나고 있다. 옷 무늬는 아래로 내려올수록 크게 조각되었는데 발은 그대로 드러나 있다. 광배는 불상과 한 돌로 되어 있다. 두려운 것을 없애준다는 약속으로 오른손 다섯 손가락을 모두 펴 위로 향해 치켜든 ’시무외인’을, 왼손은 무슨 소원이든지 들어주겠다는 약속으로 팔을 아래로 내려뜨리고 손바닥을 정면을 향하도록 ‘여원인’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두 손을 이런 모양으로 표시한 것을 ‘통인’이라 하는데 인(印)은 약속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약속을 할 때 도장을 찍는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도장 찍는 대신에 약속을 손 모양으로 표시하기 때문에 부처님의 손 모양을 수인이라고 한다. 이러한 손 모양은 특히 통일신라 이전의 불상에서 많이 나타난다.

손에 든 정병의 의미

왼쪽의 부처님은 자비를 상징하는 관세음보살상으로 대개 아미타여래의 왼쪽에 있다. 지금 연꽃무늬 받침돌(연화대좌)는 없어지고 네모난 바위 위에 서서 오른손은 설법인으로 가슴에 들고 왼손은 아래로 드리워 정병을 들고 있다. 보살이 정병을 들고 있는 것은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주듯이 괴로운 사람을 구하겠다는 보살의 약속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렇게 물건으로서 약속하는 것을 ‘계인(契印)’이라고 한다. 보름달같이 둥그런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가득 넘치는 모습이다.

광배 안의 화불(化佛)

오른쪽 부처님은 약 2.3m의 높이로 두 겹의 연꽃무늬 받침돌 위에 서 있다. 세 부처님 가운데 가장 조각이 섬세하며, 목에서부터 다리까지 내려온 구슬목걸이를 오른손으로 감싸 쥐고 왼손엔 연꽃송이를 들고 얼굴 모습은 가운데 부처님(본존)과 마찬가지로 부드럽고 자애로운 미소를 한껏 머금고 있다. 그리고 다른 두 상과는 달리 불상과 연화대좌가 한 돌로 되어 있고, 머리 뒤쪽에 있는 광배에는 작은 불상(화불) 5구가 배치되어 있다. 이 불상의 화불들도 또한 작은 광배를 가지고 있어 특이하다. 광배의 가장자리는 구름무늬로 둘렀다. 발견 당시 이 보살상은 가운데 여래상의 오른쪽에 누워 있었으므로 오른쪽 협시보살이라고 믿고 있다. 왼쪽 보살은 머리장식 중앙에 화불이 있으므로 관세음보살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오른쪽보살의 머리장식에는 있어야 할 정병이 없으니 대세지보살이라고 부르기도 힘들겠지만, 관세음보살의 반대편에 배치되었기 때문에 ’대세지보살’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얼굴 모습은 본존불과 마찬가지로 부드럽고 자애로운 미소를 한껏 머금고 있으며, 왼손은 어깨까지 들어 불경을 쥐고 있다. 무릎 부위에서 불상이 잘려 붙여놓은 것이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체험학습 과제

1

1-1. 석조여래삼존입상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석조여래삼존입상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보호각 안의 본존불 부처 얼굴의 미소를 볼 수 없는 이유와 미소를 다시 볼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말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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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경주 지마왕릉  

(사적 제221호)

지마왕

신라 제6대 지마왕의 왕릉이다. 일명 지미이사금(祇味尼師今)이라고도 하며, 성은 박씨이고 파사이사금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허루갈문왕의 딸인 사성부인이며, 비는 갈문왕 마제의 딸인 애례부인 김씨이다.

113년 시조묘에 친히 제사하고, 114년 우박과 홍수 등 재해가 심하므로 사형수를 빼고는 죄수들을 모두 풀어 주었다. 115년, 116년에 친히 군사를 이끌고 황산하(낙동강 하류)를 건너 가야를 침공하였으나 복병과 날씨 때문에 돌아왔다. 122년 왜병이 크게 쳐들어온다는 유언비어가 퍼져 백성들이 급히 산속으로 피난하므로 관리를 보내 진정시켰으며, 이듬해 왜국과 강화하였다. 125년 말갈군이 두 차례나 북쪽 국경과 대령책(지금의 대관령)으로 쳐들어와 노략질하므로 백제에 원병을 청하여 물리쳤다.

<삼국사기>에는 134년 8월에 왕이 아들이 없이 죽었다고만 전하고 있을 뿐 구체적인 장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9. 경주 포석정지  

(사적 제1호)

유상곡수(流觴曲水)에 술잔을 띄우는 풍류가 있는 곳

포석정 일대는 월성 남쪽의 이궁터[離宮址] 즉, 임금이 행차하였을 때 머무는 별궁(別宮)이라고 한다.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이궁을 지었던 것이라 하지만, 지금 여러 건축터는 알지 못하고 다만 개울가에 자리잡은 포석정터만 제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돌을 짜 맞추어 홈을 만들고 그 홈에 물을 흐르게 하였다. 그 흐르는 물에 잔을 띄워 주고받으며 즐기던 곳이다. 돌 홈 모양이 구불구불하여 전복껍질 모양과 같으므로 포석정이라 하였다. 이곳은 일반적으로 임금이 포석정 유상곡수에 술잔을 띄워 놓고 손발처럼 아끼는 신하들과 둘러앉아서 노래와 춤으로 즐기던 곳이라 알려져 있다.

포석정의 구조 - 주체부, 입수부, 출수부

현재 포석정은 화강암을 인공적으로 다듬어 안쪽과 바깥쪽에 돌을 세우고 바닥에는 별도의 돌을 깔아서 수로를 만들었는데 전체 길이 22m를 63개의 돌로 조합하여 만들었다. 규모는 동서 길이 10.3m, 남북 길이 4.9m이고, 수로의 폭은 대략 30cm 정도로, 깊이도 불규칙하기는 하지만 대략 22cm 정도이다. 유상곡수에서 물이 돌아가는 주체부와 물이 들어오는 입수부, 그리고 물이 빠져나가는 출수부를 갖추고 있다. 주체부의 모습이 구불구불하여 전복 모양이라고 해서 포석정이라는 명칭으로 불린다. 입수부에는 원래 거북이 모양의 돌이 있어서 계곡에서 끌어온 물을 공급하였다고 전하지만 현재는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처음 물이 들어오는 곳에는 가운데가 우묵한 원형의 시설이 남아있다. 또한 출수구도 물의 높이를 조절하였을 것이지만 아무런 시설이 남아있지 않고 수로 끝이 열려 있다.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의 의미

포석정

중국의 명필 왕희지는 친구들과 함께 물 위에 술잔을 띄워 술잔이 자기 앞에 오는 동안 시를 읊어야 하며 시를 짓지 못하면 벌로 술 3잔을 마시는 잔치인 유상곡수연을 하였는데, 포석정은 이를 본 따서 만들었다. 만들어진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통일신라시대로 보이며, 현재 정자는 없고 풍류를 즐기던 물길만이 남아 있다. 이 포석정의 돌 홈을 보고 있으면 떠가는 술잔이 굽이굽이 흘러가다가 어느 곳에서는 느릿느릿, 어느 곳에서는 빠르게 또는 빙글빙글 돌다가 흘러가는 율동을 느끼게 된다. 물도 잔도 춤추며 흐르는 것은 돌 홈의 경사와 굽이치는 곡선으로 알 수 있다


포석정

좌우로 꺾어지거나 굽이치게 한 구조에서 나타나는 물길의 오묘한 흐름은, 뱅뱅 돌기도 하고 물의 양이나 띄우는 잔의 형태, 잔 속에 담긴 술의 양에 따라 잔이 흐르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다고 한다. 유상곡수연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있었으나, 오늘날 그 자취가 남아있는 곳은 경주 포석정뿐으로, 당시 사람들의 풍류와 기상을 엿볼 수 있는 장소이다.

<포석정>은 연회 장소였을까?

견훤의 침략을 받은 신라의 제55대 경애왕이 자결한 장소인 포석정은 지금까지 전승된 것처럼, 단순 마시고 즐기는 연회 장소에 불과하였던 것일까? 이러한 의문점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점을 들어 다시 재고해 보도록 하자. 첫째, 경애왕이 포석정에 행차한 것은 음력으로 11월이다. 927년 음력 11월 1일은 양력으로 하면 12월 1일이 된다. 음력 11월 즉 동짓달이라는 추운 겨울에 흐르는 물에 잔을 띄우는 술잔치를 벌였을까?
둘째, 이미 9월에 견훤이 영천까지 침입하였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로 인해서 왕건에게 도움을 청해 둔 상태였다. 영천에서 경주는 40km 미만이므로 지척이라고 표현해야 할 것인데, 가까이에 적이 있는 줄을 알면서 술잔치나 벌이려고 행차한다면 이는 이치에 맞지 않는 행동일 것이다.
셋째, 헌강왕이 이곳에 행차하였을 때 남산신이 나타나서 춤을 추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남산신은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고 다만 임금의 눈에만 보였다. 이는 임금에게 어떤 계시를 주고자 하였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포석정은 특별한 곳이라고 생각된다.
넷째, 경애왕이 견훤에게 자진을 당한 뒤 신라에서의 반응을 보면, 시신을 서당에 모시고 경순왕과 신하들이 슬피 통곡을 하였다는 점이 주목된다. 만약 경애왕이 단순히 술잔치를 벌였다면 과연 신하들이 후히 장사를 지내줄 수 있었을까? 이렇게 왜곡된 원인은 아마 고려의 입장에서 서술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신라는 운수가 다하고 올바른 도리를 잃어 하늘이 돕지 않고 백성이 돌아갈 곳이 없이 되었다. 하물며 궁예와 견훤 같은 흉한 자들이 어찌 우리 태조를 대항할 수 있었겠는가?” 하였다.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에 나타난 기사만을 가지고 보면 포석정은 임금을 비롯한 신하들이 술잔치를 벌이는 유상곡수 장소이다. 이렇게 포석정이라는 곳이 단순히 술잔치를 벌이는 곳이라고 한다면 하필 나라를 지키는 병사들이 머물고 곡식과 무기를 저장해 둔 남산신성 바로 밑에 있을까? 포석정이 단순히 술잔치를 벌이는 곳이라는 기존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는 견해들이 구체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체험학습 과제

1

1-1. 포석정지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포석정지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포석정」은 (    )의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다하여 포(鮑)자가 쓰여 졌다고 한다. 무엇일까?

3

유상곡수연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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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경주 남산 창림사지 삼층석탑  

(보물 제1867호)

<창림사지>의 중요성

창림사지

창림사는 박혁거세의 탄생 설화가 전하는 나정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사찰이다. <삼국유사>에 신라 최초의 궁궐터였다고 기록된 유서 깊은 곳이다. 남산에 있는 많은 절터 가운데 사찰명이 확실할 뿐 아니라, 남산에서 가장 큰 삼층석탑이 있는 유적지이다. 산지 가람으로 축대 위에 가로 36m, 세로 36m 나비의 터가 금당지라고 생각된다. 절터에는 한 변이 약 70cm 되는 방형의 초석 중앙에 지름 62cm 정도 되는 둥근 기둥 괴임을 새긴 정교한 주춧돌이 흩어져 있다. 그리고 이 유적에서는 쌍두귀부, 삼층석탑과 탑지석, 비로자나불상, 법화경석, 명문기와 등이 확인되었다. 절터 부근에서 ‘창림사’라는 사찰 이름이 적힌 명문기와가 수습되어, 문헌에 기록된 사찰명임을 확인할 수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6부의 대표자들이 박혁거세와 알영부인을 13세 때까지 기른 궁궐이 있던 곳이었다고 한다.

<창림사지 삼층석탑>의 중요성

-조성연대가 확실하여 탑 연구에 중요한 자료

창림사지 삼층석탑

장창곡 제3사지 창림사터 삼층석탑의 탑 부재가 절터 내 동쪽 높은 대지에 무너져 있던 것을 1979년 복원하였다. 복원 당시 2층 및 3층 탑신석과 탑재 일부분이 유실되었기 때문에 옛날 모습 그대로 복원되지 못했고, 복원된 높이는 6.5m이다. 상층기단갑석의 상부에는 각형 2단으로 1층 탑신받침을 마련하였다. 1층 탑신석 사면에는 문비를 표현하였는데, 문 너비는 38cm, 높이는 102cm이다. 탑신석의 비례는 2·3층에서 현저하게 감소되었으며, 옥개받침은 5단, 탑신받침은 각형 2단으로 되어 있다. 창림사는 통일신라 때 창건하여 고려 때까지 있다가 조선 초기에 폐사되고 탑만 남아 있다. 이런 사실은 탑 안에서 발견된 창림사 무구정탑원기’로 인해 알 수 있으며, 아울러 이 탑이 조성된 것은 855년 신라 문성왕 때로 밝혀졌다. 이 탑은 그 조성 연대가 확실하여 탑 연구에 매우 중요하며, 그 크기가 남산에 가장 크고 우람한 탑이다. 오랫동안 무너져 있던 것을 1976년에 새로 복원한 것으로, 기단에 새겨져있는 팔부신중의 조각이 매우 사실적이고 훌륭하다. 팔부신중의 조각은 기단부 한 면에 두 개씩을 조각했는데 지금은 4면만 남아 있다.

팔부신중 조각에 대하여

팔부신중 조각

팔부신중은 쉽게 말하자면 부처님의 나라와 불법을 지키는 신, 즉 <천․ 용․ 야차․ 건달바․ 아수라․ 가루라․ 긴나라․ 마후라가> 라고 하는 여덟 분의 신을 말한다. 이러한 부처님 세계의 지킴이(수호신)는 팔부신중 외에도 금강역사, 사천왕, 십이지 등 많이 있다. 이러한 여러 조각들은 불교 예술의 내용을 더욱 풍부하게 하고, 인도와 중국으로부터의 전래되어 오고 교류되어진 흐름을 알 수 있게 하는 자료이기도 하다.

체험학습 과제

1

1-1. 창림사지 삼층석탑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창림사지 삼층석탑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석탑 1층 몸돌[탑신석]에 있는 조각은 무엇이며, 어떤 의미에서 새긴 것인가?

3

우리가 사용하는 ‘아수라장’ 이라는 말은 어떻게 생겨났는지 설명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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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경주 남간사지 당간지주  

(보물 제909호)

<남간사지>의 지리적 위치, 중요성

남산에서 사찰이 가장 많이 세워졌던 지역이 나정과 창림사, 남간사가 있는 지역이다. 그중 남간사는 가장 큰 사찰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현재 남간마을 전역에 사찰의 유구가 산재해 있다. 현재 남간마을 일대에 탑재(석탑으로 사용했던 돌)와 당간지주가 있는 것으로 보아 꽤 큰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동네 이름이 ‘남간’이니 <삼국유사>의 기록과 일치한다.

지금 남아 있는 유적으로는 마을 집 마당이나 밭에 절터에서 나온 초석과 장대석, 팔각대석, 목탑의 심초석 등의 석재와 남간사지 석정 및 보물 제909호인 당간지주 등이 있다. 특히 현재 보물 제909호로 지정된 남간사지당간지주는 남산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중요한 유물이다. 기와 조각들이 흩어져 발견된다. 그리고 부근에 석탑옥개석, 석등편, 팔각대좌편이 산재하는데 팔각대좌편은 길이 160cm, 너비 100cm, 두께 60cm의 돌 중앙에 직경 20cm 정도의 구멍이 뚫려 있다.

<남간사지 당간지주>의 특징

(보물 제909호)

당간지주 상부의 간구

당간이란 당을 다는 장대로서 이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하여 양쪽에 지탱하는 지주를 세우게 되는데, 이 지주를 당간지주라고 한다. 당이란 본래 사원의 문 앞에 꽂는 깃발의 일종으로서 기도나 법회 등의 의식이 있을 때 당간에 게양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당간지주는 불교 의식 또는 불교사원의 가람 배치에 있어서 중요한 몫을 차지하였던 건조물이었다. 이 당간지주는 남산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것으로 남간사의 옛터에서 약 500m 떨어진 논 가운데에 세워져 있다. 논을 경작하면서 지주의 아랫부분이 약 50㎝정도 드러나 있으며, 바닥돌은 없어진 상태이다. 기단부가 없어서 기단 위에 당간을 세우던 받침돌도 찾아볼 수 없다. 지주 안쪽 면에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구멍을 세 군데에 뚫어 놓았는데, 특히 꼭대기에 있는 것은 십(十)자 모양으로 되어 있어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이다.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일종의 홈인데 구멍이 가로로 뻥 뚫린 아래 홈을 간공(杆孔)이라하고, 그냥 ╋ 자 홈만 있는 것을 간구(杆構)라한다.특별한 장식이 없는 소박하고 간단한 형태의 당간지주로, 보존된 상태도 양호한 통일신라 중기의 작품이다. 높이 약 3.6m, 폭 66cm. 두께 45cm의 돌기둥으로, 기둥의 윗부분과 옆모서리를 줄여나갔다. 이 당간지주는 남산의 수많은 절터에서 단 하나 밖에 남아있지 않은 당간지주이다.

체험학습 과제

1

1-1. 남간사지 당간지주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남간사지 당간지주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당간지주에 있는 구멍[간공]의 용도가 무엇인지 말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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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경주 나정  

(사적 제245호)

박혁거세의 탄생지-나정(蘿井)

나정의 팔각원당

[나정]이란 단순한 우물이 아니라 신라 시조 박혁거세가 탄생한 신성한 우물이다. 나정 유적은 2005년도 까지 비석을 보호하는 건물 한 체와 우물터가 있었으나 2006년의 발굴에서 우물터는 물론, ‘팔각원당지’라는 아주 중요한 건물터가 나왔다.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없지만 나정은 신라 건국 신화가 깃든 아주 중요한 유적지인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소지왕 9년(487년) 2월, 나을에 신궁을 지었는데, 나을은 시조가 태어난 곳이다'라고 적고 있다. 신라의 건국 이야기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다 같이 기술되어 있으나 삼국유사 편이 더 상세하게 나와 있다. 2006년도 재 발굴 조사 때 발견한 나정의 팔각원당 건물터(좌)와 박혁거세가 태어났다는 삼국사기 기록을 입증하는 기원전후의 우물터(우)

 

 

박혁거세 탄생 설화

옛날 진한 땅에는 여섯 마을이 있었다. 기원전 69년 3월 초하룻날의 일이었다. 여섯 촌의 우두머리들이 각각 자제들을 데리고 다 함께 알천 둑 위에 모여 의논했다.
“지금 우리들에게는 위에서 백성들을 다스릴 임금이 없어 백성들이 모두 법도를 모르고 제멋대로 놀고 있으니 큰일이 아닐 수 없소. 하루 바삐 덕이 있는 사람을 찾아 임금으로 모시고 나라를 창건하여 도읍을 세우도록 합시다.”
이에 높은 산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남쪽 양산 기슭 나정에서 이상한 기운이 번개처럼 땅에 드리워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 모양은 마치 흰 말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절하는 것과 같았다. 사람들이 그리로 달려가 보니 자주 빛의 큰 알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 옆에 있던 말은 사람을 보자 울음소리를 길게 뽑으면서 하늘로 올라갔다. 사람들은 깜짝 놀라 그 알을 조심스럽게 쪼개 보았다. 그 속에서 한 사내아이가 나왔다. 아이의 몸에서는 광채가 나며 임금의 위용을 드러내었다. 새와 짐승들이 모여 춤을 추고 천지가 진동하며 해와 달이 맑고 밝게 빛났다. 그래서 그 아이의 이름을 혁거세왕(赫居世王)이라 했는데, 이는 ‘세상을 밝게 다스린다’는 말이다.
혁거세왕은 맨 처음 입을 열어 스스로를 '알지거서간'이라 했다. 그 때부터 임금의 존칭을 '거서간'이라 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라 이름을 서라벌, 또는 서벌이라 하였는데 더러는 사라 혹은 사로라고도 했다. 거서간은 세상을 밝게 비추는 큰 임금이라는 뜻이고, 서라벌은 아침 해가 맨 먼저 비치는 성스러운 땅이라는 뜻이다.
신라 건국과 왕의 추대 과정은 중요한 의미를 보여준다. 여섯 개의 부족이 연합하여 하나의 왕국으로 뭉쳐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으며, 여섯 부족이 서로 왕이 되려고 힘으로 다투지 않고 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여 평화로운 나라를 건국하였다는 데서 그 중요성을 찾을 수 있다.

나정에서 새로 발견된 우물터

우물터

나정 건물터 안의 실제 우물터

나정 발굴이 계속되면서 예상치 않은 유적들이 드러나고 있는데, 바로 건물의 기단이다. 건물 기단은 화강암으로 네모반듯하게 잘 다듬었으며, 기단 안쪽에는 기둥을 세운 주춧돌이 40여개나 발견되었다. 기단 바깥쪽에는 담장을 두른 흔적도 있어 박혁거세 탄생지 나정에 거대한 건물이 있었음을 증명한다. 팔각 건물터의 한 변의 기단은 8m, 폭은 20m이고, 전체 면적이 무려 90평이나 되는 대형 건물터이다. 그리고 새로운 우물터가 발견되었는데, 깊게 판 우물터 바닥에는 평평한 강돌까지 깔아 놓았다. 새로 확인된 우물터의 우물가에는 건물 기둥 구멍이 있고, 우물을 가운데 두고 해자와 목책 울타리로 이중 보호 장치를 해두었다.

6부촌장의 제사를 지내는 <양산재>(楊山齋)

양산재

서남산 아래 자리잡고 있는 양산재는 6부촌장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6부촌장은 신라가 건국되기 전 진한 땅에 알천 양산촌, 돌산 고허촌, 취산 진지촌, 무산 대수촌, 금산 가리촌, 명활산 고야촌의 여섯 촌을 나누어 다스리고 있었는데 기원전 57년에 알천 언덕에 모여 알에서 탄생한 박혁거세를 여섯 촌장이 추대하여 신라의 첫 임금이 되게 하니, 이 해가 바로 신라의 건국년이 되었다.
그 후 신라 제 3대 유리왕이 6부촌장들의 신라 건국 공로를 영원히 기리기 위해 6부의 이름을 고치고 각각 성을 내리게 되니, 양산촌은 이씨, 고허촌은 최씨, 대수촌은 손씨, 진지촌은 정씨, 가리촌은 배씨, 고야촌은 설씨이다. 이로써 신라에 여섯 성씨가 탄생되었고 각기 시조 성씨가 되었다. 이 사당은 1970년에 6부촌장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체험학습 과제

1

1-1. 나정에서 볼 수 있는 사진 중 가장 흥미 있는 부분을 찍어 보세요.
1-2. 나정에 얽힌 설화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혁거세는 어떤 과정을 거쳐 왕이 되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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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경주 오릉(五陵)  

(사적 제172호)

박혁거세와 알영부인, 남해왕, 유리왕, 파사왕의 무덤

신라의 시조왕릉으로 전하는 오릉은 봉토분으로 4기는 원형분이나 1기는 표형쌍분으로 되어 있다. 내부 구조는 알 수 없으나 무덤의 겉모습은 경주에 있는 다른 삼국시대 신라 무덤과 같이 둥글게 흙을 쌓아올린 원형봉토무덤이다. 이러한 대형 원형 봉토무덤은 신라에서는 4세기 이후 등장하는 것으로 박혁거세 당시의 무덤 형식은 아니다. 제1릉은 가장 남쪽에 있으며 높이 약 10m로 가장 높고 크다. 제 2릉은 제1릉의 동북쪽에 있으며 높이는 약 9m이다. 제3릉은 표주박형으로 봉분이 두 개인 2인용 무덤으로 제2릉의 동쪽에 있으며, 높이는 약 7.2m이다. 제4릉은 제2릉의 서쪽에 있으며 높이는 약 3.6m이다. 제5릉은 제4릉의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높이는 약 1.8m이다. <삼국사기>에는 제 1대 혁거세왕, 제 2대 남해왕, 제 3대 유리왕, 제 5대 파사왕 등 박씨 네 왕을 사릉원 내에 장사지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에서는 이와 다른 기록을 하고 있다. 혁거세왕이 재위 62년 만에 승천하였다가 그 후 7일 만에 유체가 흩어져 땅에 떨어졌고, 왕후도 따라 승하하니 사람들이 합장하고자 하였다. 큰 뱀이 방해하여 오체를 각각 장사지냈으므로 오릉 또는 사릉(蛇陵)이라 하며, 담엄사 북릉이 그것이라고 하였다.

숭덕전(崇德殿)

숭덕전 전경

숭덕전 비각

숭덕전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제사를 모시는 곳이다. 조선 세종 11년(1429)에 세웠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선조 33년(1600)에 다시 지었고, 숙종 20년(1694)에 수리하였다. 지금 경내에는 조선 영조 35년(1759)에 세운 박혁거세와 숭덕전의 내력을 적은 신도비가 있다. 이곳은 경종 3년(1723)에 이르러 숭덕전이라 불렸으며 제사를 모시는 참봉 3인을 두게 되었다. 처음에는 국가에서 모든 것을 주관하였으나 임진왜란 이후에 와서 박씨 문중에서 주관하여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1992년 7월 18일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 254호로 지정되었다.

알영 왕비 설화-알영정(閼英井)

알영정

알영정은 숭덕전 뒤편 대나무숲 속에 있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왕의 왕비 알영부인 이 태어난 곳이라고 전하는데, 우물 위에 길이 2m, 너비 50㎝ 정도의 석재 3매가 덮여 있어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다. 남쪽에 1931년에 세운 '신라시조왕비탄강유지비(新羅始祖王妃誕降遺址碑)'가 안치된 비각이 있다. 알영부인은 기원전 53년 경주의 알영정에서 태어났다. 박혁거세가 태어나자 육부촌의 사람 들은 하늘이 자신들의 소원을 듣고 임금님을 내려준 것을 소리 높여 칭송하며, “이제 천 자님이 세상에 내려왔으니 덕이 있는 여식을 찾아 배필을 정할 일만 남았구나.”하며 기뻐 했다. 그런데 바로 이날 정오 무렵이었다. 사량리라는 마을의 알영 우물가에 계룡 한 마리가 나타나 왼쪽 겨드랑이 밑으로 여자아이를 낳았는데 그 자태가 매우 고왔다. 그러나 오직 입술만은 닭의 부리처럼 생겨서 보기가 흉했다. 사람들은 신기해하기도 하고 애석해하기도 하면서 그 아이를 데리고 월성 북쪽 시내로 데리고 가서 목욕을 시켰다. 그런데 목욕을 끝내고 보니 어느 사이에 부리는 떨어지고 앵두같이 예쁜 사람의 입술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람들의 놀라움은 이후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그 시내를 부리가 빠졌다 해서 발천(撥川)이라 부르게 되었다. 사람들은 남산 서쪽 기슭에 궁궐을 짓고 하늘이 내려준 신령한 두 아이를 모셔 길렀다. 사내아이는 알에서 나왔고, 그 알이 마치 바가지처럼 생겼는지라 성을 ‘박’이라 했다. 또 여자아이는 그가 나온 우물 이름을 따서 알영이라 했다. 두 성인이 자라 열세 살이 되었을 때 혁거세는 왕으로 추대되고 알영은 왕후가 되니 기원전 57년의 일이다. 혁거세와 함께 이성(二聖)으로 칭송되었으며 남해 차차웅과 아로 공주를 낳았다.

<박혁거세>와 <알영부인>의 혼인

-북방 기마 민족과 경주 토착민과의 동맹
나정 주변에 반달모양 돌칼, 방추차, 토기 등 청동기 유물이 발견되어 박혁거세가 등장하기 이전에 이 일대에는 발달된 농경문화를 가진 농경민들의 마을이 존재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경주 전역에서 발견되는 거대한 고인돌은 지배 세력의 등장을 알리는 것으로 신라 건국 이전에 이미 나라를 세울 수 있는 정치적인 토대가 갖추어져 있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철기의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박혁거세는 청동기 문화를 지닌 지배 세력들을 통합하고 신라를 건국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강력한 철제 무기와 기마 문화를 가지고 북방에서 이주해온 신흥 세력이 경주에 정착한 뒤 어떻게 왕이 될 수 있었을까? 즉, 북방에서 내려 온 박혁거세 세력이 토착민 세력과 혼인을 통한 동맹 관계를 이루어 가능했던 것이다.

체험학습 과제

1

1-1. ‘오릉’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오릉’에 대하여 설명보세요.

2

오릉은 누구누구의 무덤일까요?

3

박혁거세와 알영 왕비의 결혼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의견을 발표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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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경주 천관사지  

(사적 제340호)

천관사지

천관사지는 사적 제340호로 지정되었으며, 면적은 9,015㎡이다. 절터는 신라 오릉 동쪽 약 200m 떨어진 논 가운데에 있으며, 현재 남아 있는 것은 폐탑 1기의 기단석이 잔존해 있고, 탑 부재 일부와 불상대좌 등이 논둑에 노출되어 있는 상태로서 전체적인 규모나 배치된 건물의 내용 등은 알 수 없다. 신라의 화랑 김유신과 천관이 라는 기녀와의 설화가 얽혀 있는 천관사는 김유신의 효심과 충성심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유적지로서, 시기로 보아 통일신라 초기에 이룩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젊었을 때 김유신은 천관이라는 기녀를 좋아하여 매일 천관의 집으로 갔다. 이를 안 어머니는 김유신에게 “내 이미 늙어서 밤낮으로 네가 성장하여 가문을 빛내기만을 기다리는데 너는 기녀집에만 드나들고 있느냐.”고 울면서 책망을 하였다. 이에 김유신은 기녀의 집을 가지 않을 것을 어머니와 서약하였다. 어느 날 김유신이 술에 취했을 때 말은 늘 다니던 대로 천관의 집까지 김유신을 태워서 갔다. 김유신은 그의 결심을 헛되게 하였다 하여 말의 목을 베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 천관은 그런 유신을 사모하다 못해 목숨을 끊었고, 훗날 김유신은 천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천관의 집터에 천관사라는 절을 세우고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체험학습 과제

1

1-1. 천관사지에서 월정교와 월성 쪽의 사진 을 찍어 보세요.
1-2. 김유신과 천관녀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내가 김유신이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3

천관사지 북쪽의 남천[문천]건너에 있는 김유신의 집터 유적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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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경주 월정교  

(사적 제457호)

월정교는 일정교와 함께, 『삼국사기』 경덕왕조의 “경덕왕 19년 2월 …… 궁의 남쪽 문천상에 춘양(春陽), 월정(月淨) 두 다리를 놓았다.”라는 기록에 전하는 교량으로 판단되고 있다. 시대가 변천되면서 월정교(月淨橋)는 월정교(月精橋)로, 춘양교(春陽橋)는 일정교(日精橋)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이들은 각각 달과 해의 정령을 상징하는 월정교와 일정교로 이름이 정해진 것으로 여겨진다. 월정교는 남·북편 교대와 4개소의 주형 교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길이는 약 60.57m로 추정되며, 교각 사이에서 불에 탄 목재편과 기와편이 수습된 것으로 보아 교각 상면에 누각 건물 형태로 된 누교(樓橋)였을 것이라 추측한다. 2000년대 들어 복원하는 공사가 계속되고 있다.

체험학습 과제

1

1-1. ‘월정교’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월정교’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월정교’ 다리발을 살펴보면 단면이 직사각형이 아니고 남천의 상류와 하류 방향으로 뾰족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하였을 때의 장점은 무엇인지 토론하여 기록하세요.

3

‘월정교’는 하류쪽으로 10여 m되는 곳에 나무로 된 다리를 나란하게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두 다리는 동시에 있었을까요? 동시에 있었다면 왜 두 개가 필요했을까를 토론하고, 기록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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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경주 최부자댁  

(국가민속문화재 제27호)

경주 최부자댁

경주 최씨 가암파[佳巖波 혹은 정무공파貞武公波]의 분파인 동파東派[혹은 가암삼파佳巖三派] 종가이다. 분파 시조인 송정 최동량(松亭 崔東亮 1598~1664)은 정무공의 셋째 아들이므로 삼파라고도 하고 내남의 동쪽에 있다고 하여 동파라고 한다. 정무공 최진립(貞武公 崔震立 1568~1636) 이래 내남에 살고 있었는데, 최동량 때인 1644년에 이조리에서 고택 일부를 헐어 교촌에 옮겨 짓고 이사하게 되었다. 교촌에는 옆에 향교가 있음으로 해서 부잣집의 큰 저택이 들어서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기둥을 30cm정도 잘라서 가옥의 높이는 향교 건물보다 높지 않도록 제한하는 세심함을 베풀어 겸허한 삶의 철학을 반영하였다고 한다. 이때 지어진 건물은 교동법주를 빚고 있는 가옥이다. 새집 후원 일대에는 소나무와 느티나무를 비보수로 조성하여 향교 송단과 연결하였다. 최진립의 8세손인 용암 최기영(龍庵 崔祈永 1768~1834)의 장남 응서 최세린(應瑞 崔世麟 1791~1846)이 1831년에 현재의 최씨 고택 자리에 새로이 큰 집을 짓고 내남에서 이사하였다. 이때 동쪽에 인접한 향교보다 1m 이상 낮추어 터를 정지하였다. 또 향교와 담장이 닿지 않도록 사이에 하인들이 거주하는 가랍집을 지어 차단하였다. 원래 99칸이었다고 전하는데 사랑채, 안채, 사당, 문간채, 고방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후 후손들은 앞쪽으로 분가하여 현재와 같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향교가 있는 곳이므로 행정단위로는 교동(校洞)이라 하지만 전통적으로 교촌(校村)이라 불러 왔기에 여기서도 이를 사용한다.

체험학습 과제

1

1-1. 경주 최부자댁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경주 최부자댁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교촌 경주 최씨 동파 종가댁에 전하는 여섯 가지 가르침[六家訓]이 있습니다. 이를 조사하여 적어보세요.

3

경주 최부자댁

그림의 석조 유물이 어디
에 있는지 찾아보세요.
또 무엇에 쓰이던 유물인지를 생각해보세요.

4

교촌 경주 최씨 동파 종가댁은 벼슬을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는 가훈이 내려옵니다. 실제로 조선시대 중기 이후 9대에 걸쳐 진사를 배출하였는데, 이렇게 높은 벼슬을 하지 못하게 한 이유는 무엇인지 토론하고 기록하세요.

5

“재산은 만석 이상의 재물을 모으지 말 것, 흉년이 들면 남의 논밭을 사들이지 말 것, 더하여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들 사실을 통해 집안 경제를 운영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데 무엇을 가르치고자 한 것일까를 토론하고 기록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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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경주 향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1호)

창건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 때 빼어난 유학자들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의 중등교육과 지방민의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신라 신문왕 2년(682) 국학이 설치되었던 곳이라 한다. 그 뒤 1492년(성종 23) 경주부윤 최응현이 중수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대성전이 소실되어 위패를 도덕산 두덕암으로 옮겼다가 1600년(선조 33) 경주 부윤 이시발이 대성전과 전사청을 중건하고 위패를 다시 돌려 안치하였다. 1614년(광해군 6) 부윤 이안눌이 명륜당을 중수하고 동서 양무를 중건하였으며, 1668년(현종 9)에 보수하였다.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19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명륜당·동무·서무·전사청·내신문 등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대성전에는 5성인, 송나라 2현, 우리나라 18현인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전답과 노비·전적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현재는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하고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으며, 전교 1명과 장의 수 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체험학습 과제

1

1-1. 조선시대 선비들이 학습하던 명륜당 앞에서 건물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향교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경주 향교가 가지는 구조상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인가를 토론하고 기록하세요.

3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인 향교와 서원은 어떤 관계인지 조사 토론하고 기록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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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경주 계림  

(사적 제19호)

경주 계림경주 반월성에서 첨성대로 내려가는 중간에 위치한 숲이다. 숲 가운데로 시냇물이 흐르고, 울창한 숲이지만 이곳의 나무를 함부로 베지 않아 옛모습 그대로이다. 『삼국유사』에는 서기 60년(탈해왕 4년) 8월 4일 밤에 호공(瓠公)이 월성 서쪽 마을을 지나가는데 마을 옆의 시림(始林)이 온통 환한 광명으로 차 있었다. 가까이 가 보니 자줏빛 구름이 하늘에서 그 숲속으로 드리워져 있었고, 그 구름 속으로는 황금으로 된 궤(櫃) 하나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다. 그 나무에는 흰 닭 한 마리가 울고 있어 이 광경을 탈해왕에게 고하자 왕이 거동하여 궤를 열어 보니 그 속에는 한 사내아이가 누워 있다가 일어났으므로 그 아이를 ‘알지(閼智)’라 했다. ‘알지’란 순우리말로 ‘아기’를 뜻한다. 탈해왕이 ‘알지’를 안고 궁으로 돌아와 태자로 삼았으나 알지는 왕위를 파사에게 양보했다. ‘알지’는 금궤에서 나왔다고 해서 성을 김(金)으로 하였다. 그 후 ‘알지’의 6대손인 미추가 김씨로는 최초로 신라왕이 되었다. 현재 계림에는 약 100여 그루의 고목이 우거져 있으며, 1803년에 세운 비가 비각 속에 서 있다

체험학습 과제

1

1-1. 계림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계림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계림에 있는 비각에 있는 비는 언제 세워진 것인가를 조사 토론하여 기록하세요.

3

계림 속에 세워져 있는 향가비를 찾아 어떤 노래인지 기록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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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경주 첨성대  

(국보 제31호)

경주 첨성대

신라시대 천문을 관측하던 천문대(臺)로 알려져 있다. 석조 건축물로 높이는 9.5m이며 국보 제31호이다. 이 근방을 일반적으로 비두골 또는 비두거리 라고 하는데, 북두칠성에 다른 별을 비교해서 국가의 안위와 길흉화복을 점쳤다는 뜻이다.
구조면에서 살펴보면. 아래의 기단부, 병모양의 원통부, 다시 그 위의 정井자모양 돌로 된 정상부로 나눌 수 있다. 기단부 아래의 땅속에는 잡석과 받침돌, 그리고 기단부 서쪽으로는 일렬로 자연석이 놓여 있다. 이 기단부는 남쪽변이 정남에서 동쪽으로 19o정도 돌아가 있는데, 이 방향은 북두칠성을 바라보는 방향과 일치한다.
또 13단에서 15단에 걸쳐서 정남에서 동쪽으로 약 16。가 되는 방향을 향하여 한 변이 약 95cm되는 정사각형의 창구가 있다. 창구의 내부 아래쪽은 잡석으로 채워져 있으며, 그 위쪽은 정상까지 뚫려 속이 비어 있는 형태이다. 19단과 20단, 25단과 26단에 동서남북으로 2개씩의 긴 돌[장대석]이 걸쳐 있어 정井자모양을 이루고 있다. 27단의 원통부위에는 각 네 개씩으로 짜인 정자석이 두 단에 걸쳐 놓여 있어서 정상부는 사각형을 이룬다. 현재로서는 남쪽면이 정남에서 서쪽으로 약 8。 정도 돌아가 있다.
돌의 개수는 종래 365개라고 하여 왔으나, 기단석까지를 포함하느냐 않느냐에 따라 달라지므로 정확히 365개는 아니다. 1962년 12월 당시 국립경주박물관장이던 홍사준과 정영호, 유문룡 등이 확인한 바에 따르면, 기단부를 제외한 1~27단까지가 362매, 지대석 8매, 기단석 12매, 상부 정자석 8매, 중간 정자석 8매, 남측 문기둥 2매, 27단의 판석 1매로서 도합 401매이다.

체험학습 과제

1

1-1. 첨성대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첨성대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첨성대를 왜 하필 원통형으로 만들었을까를 기록해 보세요.

3

첨성대와 다음 사항을 비교하여 토론하고 기록하세요.
첫째, 주변의 나무들과 비교하면?
둘째, 신라시대에 주변 나무들의 높이는?
셋째, 첨성대의 높이가 이정도 돼야하는
이유는?

4

신라시대에 하늘을 관측하는 천문대가 갖춰야 할 조건을 다음과 같이 세분하여 토론하고 기록하세요.

첫째. 위치조건 :
둘째. 구조조건 :
셋째. 높이조건 :

5

첨성대는 천문관측에 사용되던 천문대인가, 아니면 하늘에 제사지내던 제단인가? 하나를 고르고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기록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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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경주 월성  

(사적 제16호)

경주 월성

월지 서남편에 있는 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왕궁이었으며 사적 제16호이다. 흙과 돌로 쌓은 도성으로 현재 부분적으로 성벽과 건물지가 있다. 이러한 신월성은 경주 시가지를 중심으로 보아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행정구역상으로는 경주시 인왕동 449-2번지이다. 남천(문천 또는 사천) 북쪽에 접한 낮은 언덕을 연결하고 자연 지세를 최대한 이용해 성벽을 쌓았기 때문에 성곽의 형태가 반월형(사실은 초승달 모양)을 이루고 있다. 동쪽, 서쪽, 북쪽은 낮은 12개의 산봉을 연결하여 쌓았고, 남쪽은 자연 지세를 많이 활용하여 쌓았는데, 지형이 절벽을 이루기 때문에 성벽의 외부를 손질하는 정도로 쌓았을 것이라 추측되고 있다. 성벽 기저부까지 남천의 물이 와 닿고 있다. 성안의 전체적인 지세는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으며, 성안 지반의 높이는 성밖보다 약 7m가 높고, 남천을 접한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세 성벽은 약간 높은 언덕과 같이 토루가 둘러져 있다. 현재 성벽 중 가장 높은 곳은 국립경주박물관과 연접한 곳인 동남쪽으로 약 10~18m가 된다. 성의 규모는 동서 860m, 남북 250m, 성 전체 둘레는 1841m, 면적은 1830.600m2이다. 월성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은 일제강점기시대와 1979과 1980년에 부분적인 발굴을 하였던 적이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월정교 부근의 성벽을 조사하였는데, 성벽의 너비는 36척(10.9m), 높이는 중앙에서 12척(306m) 내외였다고 한다. 또한 성벽 밑은 김해식 토기를 포함한 철기시대 문화층이 있었다. 1979~1980년에 있었던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발굴은 월지로 통하는 동북문지로 토성의 기단부 석렬과 구조물에 대한 흔적 등이 확인되었다. 원래 월성 안에는 남문과 정문격인 귀정문, 북문, 인화문, 현덕문, 무평문, 준례문 등의 문과 월상루, 망덕루, 명학루, 고루 등의 누각, 왕이 정사를 보던 남당, 신하의 조하를 받고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조원전, 양궁, 사량궁, 대궁을 관할하던 새성 등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터만 추정될 뿐이다. 월성에는 호공과 석탈해, 비담과 염종의 난 때에 김유신과 김춘추가 이곳을 근거지로 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경덕왕과 충담사의 찬기파랑가 등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월성 안에는 경주 석씨의 시조를 모시던 숭신전도 있었으나 1980년 동천동 석탈해왕릉 동남쪽으로 옮겼다. 동쪽의 명활성, 서쪽의 서형산성, 남쪽의 남산신성, 북쪽의 북형산성이 나성의 역할을 하였다. 월성 주위에는 사방으로 해자가 둘러져 있어 성을 호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월성 내부와 해자에 대한 대대적인 발굴이 진행 중에 있어 멀지 않아 그 전모가 밝혀질 것으로 기대된다.

체험학습 과제

1

1-1. 월성의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월성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월성 안에서 조선시대의 경복궁 근정전처럼 임금님이 정사를 보던 중심 건물인 조원전은 어디에 있었을까 추정해 보세요. 그곳으로 추정하는 근거는 무엇인가를 기록하세요.

3

경주 월성

월성 안 발굴현장 서남쪽에서 그림의 유적을 찾아보세요. 어떤 유물일까 토론하고 기록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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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경주 석빙고  

(보물 제66호)

경주 석빙고

월성 북쪽 성루 중간 지점에 성루를 자르고 남쪽에 입구를 내었으며 안으로 들어갈수록 바닥이 경사지게 하여 물을 성 밖으로 배출하도록 설치돼 있는데, 보물 제66호이다. 내부는 동서로 무지개 구조[홍예] 5개를 틀어 올리고, 홍예와 홍예 사이의 천장에는 세 곳에 배기공을 설치하였다. 출입구 높이는 1.8m, 너비 2.0m의 크기로 만들고, 계단을 설치하여 밑으로 내려가게 되어 있다.『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3대 유리왕 때부터 얼음 창고가 있었다고 하였으며, 『삼국사기』에는 지증왕 6년 11월에 유사에게 명하여 얼음을 저장하도록 하였다는 기사가 보인다. 이로 미루어 보면 신라시대에는 일찍부터 얼음을 저장하여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경주시 내남면 노곡리에서도 근래에 얼음저장고로 보이는 유적이 발굴되기도 하였다. 월성에 있는 현재의 석빙고에 대해서는 신라시대에 축조한 것을 현재 위치로 옮겼다는 설과 조선시대 축조설로 나눌 수 있다. 신라시대 축조설은 일제강점기시대 일본인학자들에 의해 주장되었고, 조선시대 축조설은 1960년대에 이화여대 진홍섭 교수에 의해 제기되었다. 진홍섭 교수는 조선시대에 이곳에 석빙고를 설치한 이유로 첫째, 성 남쪽에 남천이 흐르고 있어 채빙하기에 편하다는 점, 둘째, 성루의 경사를 이용할 수 있었다는 점, 셋째, 전체적인 구조와 설계가 조선시대에 세워진 청도 석빙고, 대구광역시 기상대 내에 있는 석빙고비명, 안동 석빙고, 경남 창녕읍 석빙고 등과 같다고 하였다. 이외에도 축조년대를 알 수 없는 석빙고인 창녕군 영산면 석빙고, 달성군 현풍읍 석빙고 등을 예로 하면서 모두 조선시대로 축조연대를 추정했다.

경주 석빙고

<석빙고 내부 입구 계단>

아울러 경주의 석빙고도 경상북도, 경상남도의 석빙고와 마찬가지로 18세기 전반에 축조되었을 것이라 하였다. 이 석빙고 서쪽에 있는 석빙고 관련 비에 의하면 1738년(영조14년)에 당시 경주 부윤이던 조명겸이 나무로 된 얼음 창고[빙고]를 돌로 된 얼음 창고로 축조하였다는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또 석빙고 입구 이맛돌에는 “숭정기원후 재신유 이기 개축(崇貞紀元後再辛酉移基改築)”이라고 쓰여 있어 4년 뒤에 동쪽으로 100m 정도 옮겨 현재 위치에 다시 쌓았음을 알 수 있다. 옮기기 전의 옛 위치는 서쪽에 남아 있다.

체험학습 과제

1

1-1. 석빙고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석빙고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경주 석빙고는 신라시대에 축조된 것인지, 아니면 조선시대에 축조된 것인지 하나를 선택하고,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기록하세요.

3

경주 석빙고

그림은 석빙고의 횡단면도와 석빙고 홍예 사진입니다. 무지개 구조[홍예]의 장점이 무엇일까를 토론하고 기록해 보세요.

4

경주 석빙고

석빙고의 종단면도입니다. 위쪽 배기공은 왜 필요했는가를 기록하세요.

5

경주 석빙고

그림은 석빙고의 평면도입니다. 이곳 경주 석빙고 출입구가 향하는 방향을 기록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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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왕실 연대표  

신라 왕실 연대표

왕 명

재위기간

약 사

1

박혁거세
(朴赫居世,BC69~AD4)

BC57~

AD4

13세에 왕위에 올라 나라 이름을 서라벌이라 함. 왕21년에는 수도를 금성(金城)이라 하고 성을 쌓아 국가의 기초를 세움.

2

남해차차웅
(南解次次雄,?~24)

4~24

박혁거세의 맏아들. 석탈해(昔脫解, 탈해왕)를 사위로 삼아 정사를 맡김. 병선 100여척으로 왜구 격퇴.

3

유리이사금
(瑠璃尼師今,?~57)

24~57

남해왕 아들. 6부(部)의 이름을 고치고 성(姓)을 내렸으며 신라 가악의 기원 인 '도솔가' 등을 지음

4

탈해이사금
(脫解, BC19~80)

57~80

석탈해(昔脫解). 65년 국호를 계림(鷄林)이라 고침. 김알지탄생.

5

파사이사금
(婆娑, ?~112)

80~112

유리왕 아들. 월성을 쌓아 백성을 옮겨 살게 하고, 여러 나라를 병합하여 국위를 떨침.

6

지마이사금
(祗摩, ?)

112~134

파사왕의 맏아들. 백제의 협조로 말갈을 물리쳤음.

7

일성이사금
(逸聖, ?)

134~154

아버지는 유리왕의 형. 농본정책으로 경지를 개간하고

백성의 사치를 금함.

8

아달라이사금
(阿達羅, ?~184)

154~184

원명은 아달라이사금(阿達羅尼師今). 현(縣)의 설치와

도로 개통 등 내치에 힘씀.

9

벌휴이사금
(伐休, ?~196)

184~196

탈해왕의 손자

10

나해이사금
(奈解, ?~230)

196~230

벌휴왕의 손자

11

조분이사금
(助賁, ?~247)

230~247

제귀왕(諸貴). 벌휴왕의 손자

12

첨해이사금
(沾解, ?~261)

247~261

벌휴왕의 손자, 조분왕의 동생. 고구려와 국교를 통함

13

미추이사금
(味鄒, ?~284)

262~284

김씨 왕가의 시조

14

유례이사금
(儒禮, ?~298)

284~298

조분왕의 맏아들. 백제와 수교함

15

기림이사금
(基臨, 289~310)

298~310

조분왕의 둘째아들. 307년에 국호를 신라로 고침

16

흘해이사금
(訖解, ?~356)

310~356

기림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군신들의 추대로 즉위함

17

내물마립간
(柰勿麻立干,?~402)

356~402

중국문물 수입에 힘씀. 나밀왕(那密)이라고도 함

18

실성마립간
(實聖, ?~417)

402~417

내물왕이 죽은 후 백성들의 추대로 즉위. 내물왕의 태자 눌지를 시기하여 죽이려다 도리어 피살됨

19

눌지마립간
(訥祗, ?~458)

417~458

내물왕의 아들. 실성왕의 사위. 438년 우차법(牛車法)을 제정하였다. 458년 고구려의 묵호자(墨胡子)가 불교를 전파

20

자비마립간
(慈悲, ?~479)

458~479

왕17년에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자 나제동맹을 맺음

21

소지마립간
(炤知, ?)

479~500

 

22

지증왕
(智證, 437~514)

500~514

휘는 지대로(智大路). 왕이라는 칭호를 처음 사용함. 이사부(異斯夫)가 우산국(于山國, 울릉도)을 점령함

23

법흥왕
(法興, ?)

514~540

휘는 원종(原宗). 514년 아시촌(阿尸村)에 소경(小京) 설치. 율령(律令) 반포. 52년 이차돈(異次頓) 순교. 532년 금관가야 멸망시킴. 536년 처음으로 연호를 건원(建元)이라함

24

진흥왕
(眞興, 534~576)

540~576

휘는 삼맥종(三麥宗). 황룡사(皇龍寺) 건립을 시작. 555년 북한산 진흥왕순수비, 561년 창녕 진흥왕순수비, 568년 황초령 진흥왕순수비와 마운령 진흥왕순수비 건립. 562 대가야 멸망시킴

25

진지왕
(眞智, ?)

576~579

휘는 사륜(舍輪)

26

진평왕
(眞平, ?~632)

579~632

휘는 백정(白淨)

27

선덕여왕
(善德, ?)

632~647

휘는 덕만(德曼). 진평왕 맏딸. 614년 경주 첨성대 건립

28

진덕여왕
(眞德, ?~654)

647~654

휘는 승만(勝蔓)

29

무열왕
(武烈, 604~661)

654~661

휘는 춘추(春秋). 태종무열왕(太宗武烈). 백제를 멸망시킴

30

문무왕
(文武, ?~681)

661~681

휘는 법민(法敏) 왕17년에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켜 삼국통일. 유언에 따라 동해 대왕암에 수장함. 667년 김유신과 함께 고구려 정벌에 나섬. 김유신(575~673) 죽음

31

신문왕
(神文, ?~692)

681~691

휘는 정명, 명지(政明, 明之). 문무왕의 아들. 만파식적을 만듦

32

효소왕
(孝昭, 643~702)

692~702

휘는 이홍(理洪),이공(理恭). 신문왕의 맏아들. 692년 설총이 이두(吏讀)를 정리

33

성덕왕
(聖德, ?~737)

702~737

휘는 흥광(興光). 723년 혜초가 서역(西域)에서 돌아와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저술

34

효성왕
(孝成, ?~742)

737~742

휘는 승경(承慶). 성덕왕의 둘째 아들

35

경덕왕
(景德, ?~765)

742~765

휘는 현영(憲英). 751년 대상(大相) 김대성(金大成)이 불국사(佛國寺) 창건

36

혜공왕
(惠恭, 765~780)

765~780

휘는 건운(乾運). 경덕왕의 아들. 8세에 즉위하여 여자 놀이를 하며 여자처럼 행동을 함. 대공의 난, 김지정의 난 등으로 나라가 어지러웠으며 선덕왕에게 피살됨. 770년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 주조

37

선덕왕
(宣德, ?~785)

780~785

휘는 양상(良相). 내물왕의 10세손

38

원성왕
(元聖, ?~798)

785~798

휘는 경신(敬信).김주원 이 냇물이 넘쳐 궁에 못들어가자 먼저 궁에 들어가 왕이됨. 788년 처음으로 독서출신과(讀書出身科)를 설치

39

소성왕
(昭聖, ?~800)

798~800

휘는 준옹(俊邕). 원성왕의 태자인 인겸(仁謙) 의 아들.

2년 만에 죽자 이후에 왕위 쟁탈전이 벌어 졌음

40

애장왕
(哀莊, 788~809)

800~809

13세에 즉위. 섭정하던 숙부 김언승(金彦昇)에게 왕위 빼앗기고 시해됨. 해인사 창건

41

헌덕왕
(憲德, ?~826)

809~826

휘는 언승(彦昇). 조카를 죽이고 왕이됨. 친당정책. 백영(白永)에 명하여 패강(浿江)에 300리나 되는 장성을 쌓음

42

흥덕왕
(興德, ?~836)

826~836

휘는 수종(秀宗), 경휘(景徽). 원성왕의 손자며 헌덕왕의 아우. 828년 완도에 청해진을 만들어 장보고(長保皐)에게 관리토록 함. 능은 경북 경주 안강읍 육통리

43

희강왕
(僖康, ?~838)

836~838

휘는 제륭(悌隆), 원성왕의 손자. 흥덕왕이 후사 없이 죽자, 삼촌인 균정(均貞)을 죽인 후 왕위에 올랐으나, 그를 도운 김명(金明)등이 난을 일으키자 자살함

44

민애왕
(閔哀, ?~839)

838~839

김명(金明). 시중으로 있을 때 흥덕왕이 죽자, 김제륭을 왕으로 내세우고 스스로 상대등이 되었다가 흥강왕을 죽게 하고 왕이됨

45

신무왕
(神武, ?~839)

839

휘는 우징(祐徵). 민애왕을 죽이고 왕이 되었으나, 수개월 뒤 반대파인 죽은 이홍(利弘)의 저주를 받아 죽었다함

46

문성왕
(文聖, ?)

839~857

휘는 경응(慶膺). 신무왕의 태자. 846년 장보고 반란, 염장(閻長)에게 피살됨

47

헌안왕
(憲安, ?~861)

857~861

휘는 의정(誼靖). 후사가 없어 왕족 응렴(膺廉)을 사위 삼고 왕위를 물려줌

48

경문왕
(景文, ?~875)

861~875

휘는 응렴(膺廉)

49

헌강왕
(憲康, ?~886)

875~886

휘는 정(晸). 처용무가 유행하고, 사회가 사치와 환락에

빠져듦

50

정강왕
(定康, ?~887)

886~887

휘는 황(晃). 경문왕의 둘째 아들로 진성여왕의 오빠. 몸이 약해서 즉위 2년 만에 죽음

51

진성여왕
(眞聖, ?~897)

887~897

휘는 만(曼). 병제(兵制)가 퇴폐하여 나라가 혼란에 빠짐

52

효공왕
(孝恭, ?~912)

897~912

휘는 요(嶢). 정강왕의 아들. 궁예와 견훤에게 많은 영토를 빼앗기고 정사를 돌보지 않아 후삼국이 정립되는 것을 막지 못함

53

신덕왕
(神德, ?~917)

913~917

휘는 경휘(景暉). 효공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백성의 추대를 받아 즉위함

54

경명왕
(景明, ?~924)

917~924

휘는 승영(昇英). 신덕왕의 태자. 즉위 후 쇠퇴한 국운을 건지려 후당(後唐)에 구원을 청하였으나 실패

55

경애왕
(景哀, ?~927)

924~927

휘는 위응(魏膺). 927년 포석정에서 연회를 하다가 견훤의 습격을 받자 자살함

56

경순왕
(敬順, ?~978)

927~935

휘는 부(傅). 경애왕이 죽은 후 견훤에 의하여 즉위 하였으나, 935년에 왕건에 항복하여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하여 경주 사심관(事審官)으로 여생을 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