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코스 : 서악과 왕경

[제3코스]삼한일통(三韓一統)의 영웅과 함께 걷는 길 !!! 서악과 왕경

  • 화랑교육원⇒30 무열왕릉[50]~5 서악동 귀부[20]⇒10 김유신묘[30]⇒30 노서․노동 고분군(봉황대)[30]~3 신라대종[10]~10 쪽샘유적발굴관[20]~10 대릉원(천마총, 황남대총)[40]~10 첨성대[15]~10 계림[10]~5 향교[10]~5 최부자댁[15]~5 월정교[5]~5 월성[10]~10 석빙고[10] ⇒30 화랑교육원

※ 도보 ~분 / 차량 ⇒분 / 유적지 내 체류 시간 [  ] / 중식 장소 밑줄

지도

답사 개요

  • 삼국통일의 혁혁한 공로자들의 유적지를 돌아보면서 분단의 현실을 통일의 의지로 극복한다. 또한 찬란한 신라 문화의 중심지 왕경 지역을 살피면서 신라의 찬란한 문화를 오늘에 일으켜 세울 각오를 다진다.

유의 사항

  • 도로를 횡단하거나 따라 걷는 경우가 있으므로 교통규칙을 잘 지키고, 안전에 유의하도록 특히 주의합니다.
  • 점심과 물과 간식을 반드시 준비합니다.
  • 풀숲을 통과할 수도 있으므로 운동화에 긴바지를 착용합니다.
  • 유적 유물을 훼손하지 않도록 주의하여 관찰합니다.
  • 의문은 인터넷이나 해설사를 이용하여 해결하도록 합니다.
  • 몸에 문제가 있을 때는 재빨리 인솔교사에게 말씀드려 해결합니다.
  • 발굴현장에서는 책임자의 허락을 받은 후에 관람합니다.

 

1. 경주 무열왕릉  

(사적 제20호)

태종무열왕(603~ 661, 재위 : 654∼661)

태종무열왕의 이름은 춘추로 579년 화백회의에 의해 폐위된 진지왕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용춘이고, 어머니는 진평왕의 딸 천명부인이다. 김유신의 막내 동생인 문희를 왕비로 삼았는데 문명왕후이다.
최초의 진골 출신의 왕인 김춘추는 642년(선덕여왕 11)에 백제의 윤충 장군에 의해 대야성(지금의 합천)이 함락당하고 성주인 사위인 품석과 딸을 잃자 고구려에 가서 군사를 요청하였으나 연개소문에게 거절당하였다. 이에 위기에 처한 신라를 구하기 위해 왜국과 당나라를 오가며 외교 활동을 벌여서 당 태종으로부터 군사협력의 약속을 받았다.
647년(선덕여왕 16) 비담과 염종의 난을 진압한 뒤에 김유신과 함께 권력을 장악하였다. 654년 진덕여왕이 죽자 김유신의 지원을 받아서 왕위에 올랐다. 당나라와의 연합으로 660년 백제를 멸망시킨 후 다음해인 661년에 죽었다.

신라의 골품제도

이 제도는 골품(骨品), 즉 개인의 혈통의 높고 낮음에 따라 정치적인 출세는 물론, 혼인, 가옥의 규모, 의복의 빛깔, 우마차의 장식에 이르기까지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 여러 가지 특권과 제약이 가해졌다.
왕족을 대상으로 한 골제(骨制)와 일반 귀족을 대상으로 한 두품제(頭品制)를 합해서 골품제도라 하는데 왕족인 성골(聖骨)과 진골(眞骨)이라는 두개의 골과 6두품으로부터 1두품에 이르는 6개의 두품을 포함해 모두 8개의 신분계급으로 나누어졌다.
이 중에서 성골은 왕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최고의 신분이었는데, 진덕여왕을 끝으로 소멸되었다. 성골이 소멸되자 최초로 진골 출신인 태종무열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 뒤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모든 왕은 진골 출신이었다.

시호와 묘호

왕이나 사대부들이 죽은 뒤에 그들의 공덕을 찬양하여 추증한 호를 가리킨다. 이에 비하여 묘호(廟號, 사당묘)는 왕이 죽은 뒤 종묘에 신위를 모실 때 붙이는 용도로 추증된 것이라는 차이점이 있다. 태종무열왕은 신라의 왕으로서는 유일하게 묘호가 있는 왕이다.
- 시호의 예 : 문무(왕), 성덕(왕), 충무공(이순신), 문창후(최치원)
- 묘호의 예 : 태조, 태종, 세종, 세조…

태종무열왕릉

경주 시가지 서쪽의 선도산에서 동쪽으로 뻗어 내린 구릉의 끝부분에 있는 5기의 대형분 가운데 가장 아래쪽에 위치한다. 원형의 봉토분으로 주위 둘레 110m에 높이가 11m이며, 매장주체는 횡혈식 석실일 것으로 추정된다. 분구의 언저리에는 호석을 받치는 자연석 받침돌들이 나와 있다.
왕릉의 위치에 대해서 『삼국사기』에는 무열왕을 영경사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삼국유사』에는 애공사 동쪽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림

태종무열왕릉비(국보 제25호)

신라의 왕릉 중에서 주인을 알 수 있는 왕릉은 많지 않다. 그러나 무열왕릉은 무덤의 주인공을 정확히 알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왕릉이다. 그것은 무열왕릉비의 용이 새 겨진 이수 앞면 중앙 아래쪽에는 전서체로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현재는 비신(내용을 적은 비석 몸돌)을 잃고, 귀부(거북 모양 비석 받침돌)와 이수(뿔 없는 용 모양 비석 머릿돌)만 남아 있다. 귀부는 직사각형의 대석 위에 거북 모양이 올려진 것으로, 네 발과 머리의 표현은 사실적이며, 등의 전면에는 6각형의 귀갑문을 조각하고 그 주위엔 구름문양을 둘렀다. 이수는 좌우에 각각 3룡씩 6룡을 표현하고 여의주를 가지고 있는 형상으로 조각하였다. 『대동금석서』속에 의하면 김인문이 비문을 지었다고 한다.

그림

 

체험학습 과제

1

1-1. 무열왕릉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무열왕릉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이 무덤이 무열왕릉이라는 증거를 찾아서 사진을 찍어 보세요.

3

무덤의 주변에 박혀있는 돌(호석)은 어떤 역할을 하는지 말해보세요.

4

태종무열왕릉비의 거북이가 앞발가락은 5개인데, 뒷발가락은 왜 4개로 조각이 되어 있을까요?
(실제 거북이는 앞, 뒤 모두 5개씩임) 상상력을 발휘해서 이유를 말해봅시다.

기수 문제번호 등록일

 

 

2. 경주 서악동 귀부  

(보물 제70호)

태종무열왕릉의 남쪽 길 건너편에 있는 높이 1.04m의 조형물로 비석을 세웠던 받침돌이다. 김인문의 공적을 새겼던 비의 일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서악서원의 영귀루 북쪽 받침에서 발견된 비석 조각에 새겨진 글과『삼국사기「열전」의 기록이 이를 뒷받침한다.
비신과 이수는 없어졌으나, 네 발로 힘 있게 바닥을 딛고 고개를 치켜들고 있는 거북의 모습이 특징적이다. 네모난 대석 위에 거북을 조각하고, 거북의 등 한가운데 비신을 끼워 넣을 수 있게 직사각형의 비좌를 깊이 팠다.
이 홈 둘레에 양각된 연화문은 꽃잎 끝부분이 뾰족하게 들린 이 시기의 전형적인 연꽃 모양이다. 비신을 꽂았던 비좌 양 쪽에는 탑에서 볼 수 있는 기둥이 조각되었다.
거북은 목을 앞으로 길게 빼고 있으며, 목선을 따라 다섯줄의 주름을 자연스럽게 새겼다. 눈 둘레에는 얕게 구름무늬로 장식했고, 수염이 새겨진 아래턱 부분 양쪽에도 날렵하게 구름무늬를 장식하여 상서로운 짐승의 신령스러운 기운을 강조했다. 강하고 날카로운 5개의 발가락에는 힘이 잔뜩 들어 있다.
등에는 낮은 부조기법으로 큼지막한 육각형의 귀갑을 같은 크기로 새겨 기하학적 엄밀성이 보인다. 각각의 귀갑 안에는 다시 갑층을 층층이 조각하여 단조로움을 피했다. 귀갑 전체에 가장자리 끝부분을 따라 구름무늬를 돌리고, 그 바깥쪽에 다시 연속된 구슬무늬를 새겨 장식성을 높였다. 이러한 문양들은 사실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신성한 동물로서 만년을 산다는 거북의 품격을 강조하고 비의 영원성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서악동 귀부는 김인문이 사망했을 당시인 통일신라시대 7세기 후반에 비석과 함께 제작되었다고 추정된다.
귀부만 남아 있지만, 태종무열왕비와 함께 당의 영향을 받아 귀부-비신-이수의 형식으로 구성된 한국 비석의 초기 예로 가치가 높다. 이는 거북의 머리가 용의 머리로 바뀌는 9세기 이전 비의 원형을 그대로 보여주는 귀부이며, 당당하고 박진감 넘치는 수법으로 통일 전후의 기상을 잘 전해주는 조각으로 주목된다.

그림

김인문(629∼694)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이자 문무대왕의 친동생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책을 많이 읽었고 특히 글씨를 잘 써 태종 무열왕의 비문을 썼고 활쏘기와 말 타기에도 능하였다. 또한 넓은 식견과 훌륭한 재주와 솜씨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20대에 당나라에 들어가 좌령군위장군이 되었고 신라에 들어와서는 군주가 되어 장산성을 쌓는데 감독을 맡았다. 외교술에 능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 당나라에게 신라측 협조사항을 받아내는데 큰 공을 세워 신라의 삼국통일에 큰 역할을 하였다. 당나라에서 관직을 지내다가 효소왕 3년(694)에 죽었다. 당 고종은 그의 시신을 호송하여 신라로 보냈으며 효소왕은 그에게 태대각간의 벼슬을 내렸고 서악에서 장례를 치르게 했다. 특별한 시설이 없이 높이 6.5m의 흙으로 높이 쌓아 올린 원형봉토분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김인문묘와 김양묘는 태종무열왕릉에 가장 가까이에 있는 작은 딸린무덤으로 배치되었다.

그림

김양(808∼857)

태종무열왕의 9대손으로 흥덕왕 3년(828)에 고성 태수가 되었고 무주 도독을 지냈다. 가는 곳마다 많은 공적을 남겨 명성이 높았다고 한다. 830년에 장보고와 함께 민애왕을 죽이고 우징(신무왕)을 왕으로 추대하여 모셨으며 신무왕이 일찍 죽자 뒤를 이은 문성왕을 다시 모셨다. 문성왕 19년(857)에 나이 50세로 죽자 그에게 대각간의 벼슬을 내리고 태종 무열왕의 능 서열에 따라 그 곳에 같이 모셨다. 특별한 시설 없는 무덤이며 흙으로 높게 쌓아 올린 원형봉토분이다.

왜 김인문과 김양의 묘가 왕릉의 구역에 만들어졌을까?

지금은 일제강점기에 개설된 도로가 가로지르고 있어서 태종무열왕릉과 별개의 묘역처럼 보이나 본래는 같은 묘역이다. 김인문이 유능한 왕족으로서 신라의 삼국통일에 큰 공훈을 세웠기 때문에 이곳에 후장(두터운 성의로 장례를 지냄)한 것이다. 김양은 많은 공적을 남겼고, 특히 45대 신무왕을 추대한 공신이므로 신무왕의 아들인 46대 문성왕이 이 구역에 무덤을 쓰게 하였다.

체험학습 과제

1

1-1. 서악동 귀부와 김인문묘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김인문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삼국통일의 주역에는 무열왕, 문무왕, 김유신 등이 있는데, 김인문은 삼국통일에 어떤 큰 역할을 하였을까요?

3

태종무열왕릉과 김인문 묘 등에 비석을 세울 때 비석 받침돌을 거북이로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기수 문제번호 등록일

 

 

3. 경주 김유신묘  

(사적 제21호)

김유신(595 ~ 673)

본관은 김해이다. 아버지는 서현이고, 어머니는 만명이다. 본래 가야국의 시조 김수로왕의 12대손이다. 김유신은 화랑이 되어 용화향도라 불린 낭도를 이끌고 화랑정신을 길렀고, 단석산에서 삼국통일을 기원하고 무술을 닦은 뒤 국선이 되었다. 선덕여왕 말년에 상대등 비담과 염종이 일으킨 난을 토벌하였고, 고구려, 백제와의 전투에서 수많은 공을 세웠다. 654년 진덕여왕이 후사 없이 죽자 재상으로 있던 이찬 알천과 의논하여 이찬 김춘추(태종무열왕)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660년 상대등에 올랐고, 신라 정예군 5만과 소정방이 이끈 당나라군 13만이 연합하여 사비성을 함락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668년 고구려 정벌 직후 태대각간의 최고직위에 오른 후 당나라 군사를 축출하는 데 힘써 한강 이북의 고구려 땅을 수복함으로써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져 놓았다. 673년(문무왕 13) 7월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금산원에 장사지냈고, 835년(흥덕왕 10) 흥무대왕에 추존되고 경주 서악서원에 제향되었다.

김유신묘

김유신 묘는 송화산의 동쪽 구릉 위에 있다. 지름이 30m에 달하는 큰 원형분인데 둘레에는 호석과 돌난간을 두르고 12지신상을 갖춘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왕릉 중 최고의 형식을 갖추고 있는 무덤이다. 능의 앞에는 1970년대에 설치한 혼유석과 1710년에 당시 부윤이 세운 '신라태대각간 김유신묘(新羅太大角干 金庾信墓)'라는 표석이 있다. 호석에 새겨진 12지신상은 대단히 세련되게 양각으로 조각되어 있다. 몸은 사람이고 머리는 동물의 모양을 하고 있으며, 모두 평복에 무기를 잡고 있으며, 모두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다. 12지신상의 남쪽에는 오(말)가 위치하며 혼유석과 일반적으로 일치하나, 김유신 묘에서는 일치하지 않고 있다. 방위에 따라서 배치된 12지신상은 정북에 자(쥐)가 있고, 정남에 오(말)가 있다. 이곳 묘역에서 납석제 십이지신상인 묘상, 오상, 해상이 발견된 바 있다. 1973년 봉분에서 북북서쪽 16m 거리 땅속에서 납석으로 만든 해상(亥像) 하나가 발견되었는데, 이 납석상의 발견으로 인하여 1974년 김유신묘 주위의 발굴조사와 석조물 복원을 위한 실측조사 작업이 실시되었고, 그때 동쪽의 땅속에서 묘상(卯像)의 파편이 발견되었다. 이들은 높이가 30cm 정도의 작은 것으로 모두 무복을 입은 무인상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묘의 동쪽 산 밑에는 재실인 금산재가 있다.

그림

십이지신상

십이지신상은 단순히 동물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동물의 형상을 지닌 신이다. 그래서 동물을 뜻하는 일반적인 한자를 쓰지 않는다. 예를 들면 말 마(馬) 대신에 말 오(午), 개 견(犬) 대신에 개 술(戌) 등으로 표기하여 구별한다. 이 신들은 각각의 맡은 방위(방향)를 수호하고, 각각의 맡은 시각을 지키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면 자(쥐)상은 방위로는 북쪽을 수호하며, 시각은 자시(23:00~01:00)를 수호한다. 십이지신상의 방위와 시각은 아래 그림과 같다.

그림

자정과 정오

자정(子正)이라는 말은 자시(子時, 23:00~01:00)의 정가운데라는 뜻이고, 정오(正午)는 오시(午時, 11:00~01:00) 정 가운데를 뜻한다. 즉, 자정은 24:00(00:00)을 말하고, 정오는 12:00을 말한다.

오전과 오후

오전은 아침부터 12시까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오후는 12시에서 저녁때까지를 뜻하는 말이 아니다. 즉, 오전은 자정 이후부터 정오 직전까지 (00:00 이후~12:00 직전), 오후는 정오 이후부터 자정 직전까지 (12:00 이후~24:00 직전)의 시간대를 가리키는 것이다.

화랑도

김유신이라고 하면 화랑도를 연상할 수 있다. 국선도·풍월도·풍류도라고도 불리는 화랑도는 인물을 양성하여 그 가운데서 인재를 가려 국가에 등용함을 목적으로 하였다. 화랑도 이전에 원화제도가 먼저 있었으나 해체되었고, 이후에 화랑도가 생겼다. 화랑도의 총지도자에 국선을 두고 그 밑에 화랑이 있어 각각 문호를 맡았다. 화랑도의 총지도자인 국선은 원칙적으로 1명, 화랑은 보통 3∼4명에서 7∼8명에 이를 때도 있었으며, 화랑이 거느린 각 문호의 낭도는 수천 명을 헤아렸다. 화랑도는 원광법사가 귀산·취항 두 화랑에게 주었다는 세속오계(사군이충·사친이효·교우이신·임전무퇴·살생유택)가 화랑의 정신적 바탕을 이루었다. 화랑도는 그 창설로부터 삼국통일이 완성된 문무왕에 이르는 약 1세기 동안 융성하여, 삼국통일의 어려운 시기에는 강한 무사도정신으로 나타나 국난을 극복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나, 통일 후 나라에 태평시대가 계속되면서 쇠퇴하여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존속하였다.

 

체험학습 과제

1

1-1. <12지상> 중에서 자기에게 해당되는 동물 앞에서 자기 얼굴과 함께 찍어 보세요.
1-2. 김유신묘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정오와 자정을 표시하는 십이지신상은 각각
무엇일까요?

3

김유신묘 십이지신상 복장의 특징을 설명해 보세요.

기수 문제번호 등록일

 

 

4. 경주 노서동 고분군  

(사적 제512호)

그림

중심도로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노서동이라 하고, 이곳에 있는 무덤들을 노서동고분군이라 한다. 노서동 고분군에는 1921년 신라무덤으로는 처음으로 금관이 출토되어 ‘황금의 나라 신라’라는 타이틀의 문을 연 금관총이 있다. 그 서쪽으로는 스웨덴의 황태자가 신혼여행으로 세계 일주를 하는 가운데 신라 금관을 발굴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때 발굴된 금관은 꼭대기에 새 3마리가 있었으므로 ‘봉황(鳳凰)’의 ‘봉’과, 스웨덴의 한자말 ‘서전(瑞典)’에서 ‘서’자를 합쳐 서봉총이라 이름 하였다. 그런가 하면 일제강점기를 지나고 발굴된 호우총이라는 무덤이 있는데요, 해방 후에 우리 손으로 발굴한 최초의 무덤이라서 의미가 있다. 청동호우(靑銅壺杅 청동으로 만든 그릇) 1개가 출토되었다. 이것은 기형상으로는 보통 합盒이라 부르는 것으로 이 호우의 밑바닥에 ‘을묘년 국강상광개토호태왕 호우십(乙卯年國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이라는 명문이 주조되어 있어 유명하다. 이 명문의 글씨 모양은 중국 집안에 있는 광개토왕비문(廣開土王碑文)과 똑같고, 여기서의 ‘을묘년’이라는 연대는 광개토왕 사후 3년에 해당되는 415년(장수왕 3)으로 이 호우가 장수왕 3년에 광개토왕을 기념하기 위하여 고구려에서 만들어진 것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청동호우가 출토되었으므로 호우총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쌍상총이나 마총처럼 석실분 무덤이 평지에 함께 있었다는 사실도 아주 중요하다. 적석목곽분이 산지로 가면서 석실분으로 바뀌었다기 보다는 평지에서 이미 석실분이 나타나면서 무덤의 위치만 산기슭으로 옮겨갔다고 볼 수도 있다고 한다.

체험학습 과제

1

1-1. 해방 후에 우리 손으로 처음 발굴한 호우총 앞에서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호우총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서봉총 발굴현장을 찾아가서, 서봉총의 어떤 특징을 2가지 이상 기록하세요.

3

그림은 돌무지덧널무덤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위쪽 흙을 완전히 제거했을 때 모습입니다. 돌이 ㅁ자로 돌려지고, 가운데가 네모나게 움푹한 이유는 무엇일까 토론하고 기록해 보세요.

그림

 

기수 문제번호 등록일

 

 

5. 경주 노동동 고분군  

(사적 제512호)

경주시내 고분들 가운데서, 경주문화원에서 남쪽으로 나있는 도로의 동쪽에 있는 고분들을 일컫는 명칭이다. 이 도로가 조선시대 관아에서 남쪽으로 뻗은 중심도로이므로 이를 기준으로 노동과 노서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1921년 금관총을 발굴한 이후에 1924년에 발굴하여 두 번째로 금관이 출토되었으나 금관은 금관총의 대명사가 되었으므로 금방울[금령]을 대표적 유물로 정하고 금령총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금령총 금관은 천마총 금관과 같이 4단으로 되어 있으면서 곡옥이 없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 무덤 상부에서는 의식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주전자와 같은 용도를 가졌던 토기가 발견되었다. 이 토기는 말을 탄 주인상과 하인을 표현하였다고 판단되어 신라시대 말 장식 등을 연구하는데 아주 중요한 유물이고, 기마인물형토기라고 부른다. 금령총 동쪽에는 금령총보다 좀 더 높게 무덤 흔적을 남기고 있는 고분이 있는데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금동신발[식리]이 특징이므로 식리총이라고 부른다. 노동동고분군 가운데는 무엇보다 경주분지고분들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고분으로 봉황대라고 불리는 무덤이 있다. 이 무덤의 서북쪽에는 조선시대부터 성덕대왕신종이 일제강점기까지 성문을 열고 닫는 신호용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그림

무덤의 호칭


  • 임금이나 왕비의 무덤으로 주인을 알고 있을 때 사용하는 말.
    예) 무열왕릉, 선덕여왕릉 등
  • 고 분
    주인이 알려진 왕릉이나 왕비릉을 제외한, 통일신라시대 이전의 재배층의 무덤을 일컫는 말.

  • 왕릉으로 추정되지만 무덤의 주인을 알 수 없어 고분에서 대표적인 유물이나 대표성을 사용하여 붙이는 말.
    예) 금관총, 천마총, 무용총, 장군총 등

 

체험학습 과제

1

1-1. 금령총과 식리총이 봉황대와 함께 나타나도록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금관총과 금령총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경주시내에 분포하는 무덤들의 이름을 부를 때, ‘고분(古墳)’이라는 이름과 ‘○○릉(陵)’,‘○○총(塚)’, ‘○○묘(墓)’라는 이름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들의 차이점은 무엇인지 토론하여 기록하세요.

고분(古墳) :
 
○○릉(陵) :
 
○○총(塚) :
 
○○묘(墓) :

 

3

노동동 고분군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무덤을 봉황대고분이라고 부릅니다. ‘봉황대’라는 말의 의미를 토의하고, 무덤에 고목이 자라고 있는 점과 연결시켜 설명해 보세요.

기수 문제번호 등록일

 

 

6. 신라 대종  

신라대종은 경주시에서 2016년에 성덕대왕신종을 지금은 타종할 수 없음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지금의 모습을 남기기 위해서 모양을 같게 새로이 제작한 것이다. 규모나 조각 등에서 비슷하지만 정확하게 똑같다고는 할 수 없다.

체험학습 과제

1

1-1. 신라대종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신라대종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종을 치는 자리인 당좌의 각각 좌우, 네 곳에 조각된 조각상의 명칭을 기록하세요.

3

신라 대종과 같은 모양을 가진 대종으로 국립 경주박물관 안에 있는 종의 이름을 기록하세요.

기수 문제번호 등록일

 

 

7. 경주 쪽샘유적박굴관  

쪽샘유적발굴관은 신라고분 44호분을 발굴하는 과정을 일반인들에게 관람시키기 위해 고분 위에 지붕을 씌워 전시관처럼 만든 곳이다. 내부에서는 발굴작업이 계속 진행 중에 있어 신라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의 구조를 생생하게 현장에서 볼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것이다.

그림

체험학습 과제

1

1-1. 쪽샘 유적 중 고분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쪽샘유적발굴관 주변 경주평지에는 매우 많은 고분들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숫자가 붙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요, 이곳 전시관 역시 “44호분”이라고 합니다. 이런 숫자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토론하여 기록하세요.

3

신라에서는 여러 형태의 무덤이 시대에 따라 변화하여 왔습니다. 전시관 안에서 무덤의 변화를 찾아 기록하세요. 또, 오늘날 산에 무덤을 쓰는 것과 같은 형식을 무엇이라고 하는지 기록하세요.

기수 문제번호 등록일

 

 

8. 경주 대릉원<천마총>  

(사적 제512호)

황남동 고분군의 발굴된 고분 중에서 유일하게 내부를 공개하고 있는 고분이 제155호인 천마총이다. 1973년 발굴과정에서 껴묻거리 가운데 말다래가 출토되었는데, 여기에는 날개 달린 말이 그려져 있어 천마총으로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말다래[장니]란, 말을 탄 사람의 옷에 흙이 튀지 않도록 말안장 양쪽에 늘어뜨려 놓는 마구를 말한다. 천마도가 그려진 말다래는 자작나무껍질을 여러 겹 겹쳐 누벼서 만든 것이며, 국보 207호로 지정되어 있다. 천마총은 바닥의 지름이 47m, 높이가 12.7m인 원형봉토분이다. 천마총의 축조양식은 먼저 땅을 잘 고른 다음 바닥 위에 진흙을 깔고, 진흙층 위에 다시 냇돌을 깔았다. 그리고 냇돌층 위에는 나무 덧널을 설치했다. 나무 덧널 내부에 껴묻거리를 넣은 상자와 시체를 넣은 나무 널을 수직으로 내려 안치했다. 나무 덧널 위를 다시 냇돌을 쌓아 덮었고, 그 냇돌층을 다시 진흙을 발라 층을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이 위에 흙을 쌓아 봉분을 만들었기에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이라 한다.

그림

체험학습 과제

1

1-1. 천마총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천마총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그림

그림은 천마총을 발굴하면서 그린 동서 단면도입니다. 안쪽 돌이 고깔모양으로 무너져 내린 이유는 무엇인지 기록해 보세요.
또, 그림에서 봉분 흙이 안쪽으로 경사가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인지 기록해보세요.

 

3

2번 그림에서 봉분 흙이 안쪽으로 경사가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인지 기록해 보세요.

4

그림

그림은 돌무지덧널무덤인 천마총과 황남대총에서 나온 금관을 펼쳐 그린 그림입니다. 이들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인지 기록해보세요.

기수 문제번호 등록일

 

 

9. 경주 대릉원<황남대총>  

(사적 제512호)

경주 평지에 있는 고분 가운데서 98호분 황남대총과 155호분 천마총을 발굴하고 내부를 공개하는 과정에서 공원으로 조성한 곳이 대릉원이다. 대릉원 안에는 전.미추왕릉을 비롯한 20 여 개의 고분이 있고, 주변에는 정비할 당시 발굴한 고분들이 많다. 대릉원에는 1906년 처음으로 신라고분을 발굴한 100호분 검총도 있다.

그림

체험학습 과제

1

1-1. 황남대총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황남대총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그림

위 그림은 황남대총 남분과 북분의 발굴도면이다. 아래 그림은 북분의 조성을 추정한 그림이다. 나무널과 나무덧널 및 봉분과의 관계를 기록해보세요.

3

대릉원에서 가장 큰 고분을 찾아보고 어느 것인지 이름을 기록하세요.

기수 문제번호 등록일

 

 

10. 경주 첨성대  

(국보 제31호)

경주 첨성대

신라시대 천문을 관측하던 천문대(臺)로 알려져 있다. 석조 건축물로 높이는 9.5m이며 국보 제31호이다. 이 근방을 일반적으로 비두골 또는 비두거리 라고 하는데, 북두칠성에 다른 별을 비교해서 국가의 안위와 길흉화복을 점쳤다는 뜻이다.
구조면에서 살펴보면. 아래의 기단부, 병모양의 원통부, 다시 그 위의 정井자모양 돌로 된 정상부로 나눌 수 있다. 기단부 아래의 땅속에는 잡석과 받침돌, 그리고 기단부 서쪽으로는 일렬로 자연석이 놓여 있다. 이 기단부는 남쪽변이 정남에서 동쪽으로 19o정도 돌아가 있는데, 이 방향은 북두칠성을 바라보는 방향과 일치한다.
또 13단에서 15단에 걸쳐서 정남에서 동쪽으로 약 16。가 되는 방향을 향하여 한 변이 약 95cm되는 정사각형의 창구가 있다. 창구의 내부 아래쪽은 잡석으로 채워져 있으며, 그 위쪽은 정상까지 뚫려 속이 비어 있는 형태이다.
19단과 20단, 25단과 26단에 동서남북으로 2개씩의 긴 돌[장대석]이 걸쳐 있어 정井자모양을 이루고 있다. 27단의 원통부위에는 각 네 개씩으로 짜인 정자석이 두 단에 걸쳐 놓여 있어서 정상부는 사각형을 이룬다. 현재로서는 남쪽면이 정남에서 서쪽으로 약 8。 정도 돌아가 있다.
돌의 개수는 종래 365개라고 하여 왔으나, 기단석까지를 포함하느냐 않느냐에 따라 달라지므로 정확히 365개는 아니다. 1962년 12월 당시 국립경주박물관장이던 홍사준과 정영호, 유문룡 등이 확인한 바에 따르면, 기단부를 제외한 1~27단까지가 362매, 지대석 8매, 기단석 12매, 상부 정자석 8매, 중간 정자석 8매, 남측 문기둥 2매, 27단의 판석 1매로서 도합 401매이다.

체험학습 과제

1

1-1. 첨성대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첨성대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첨성대를 왜 하필 원통형으로 만들었을까를 기록해 보세요.

3

첨성대와 다음 사항을 비교하여 토론하고 기록하세요.
첫째, 주변의 나무들과 비교하면?
둘째, 신라시대에 주변 나무들의 높이는?
셋째, 첨성대의 높이가 이정도 돼야하는
이유는?

4

신라시대에 하늘을 관측하는 천문대가 갖춰야 할 조건을 다음과 같이 세분하여 토론하고 기록하세요.

첫째. 위치조건 :
둘째. 구조조건 :
셋째. 높이조건 :

5

첨성대는 천문관측에 사용되던 천문대인가, 아니면 하늘에 제사지내던 제단인가? 하나를 고르고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기록하세요.

기수 문제번호 등록일

 

 

11.경주 계림  

(사적 제19호)

경주 계림경주 반월성에서 첨성대로 내려가는 중간에 위치한 숲이다. 숲 가운데로 시냇물이 흐르고, 울창한 숲이지만 이곳의 나무를 함부로 베지 않아 옛모습 그대로이다. 『삼국유사』에는 서기 60년(탈해왕 4년) 8월 4일 밤에 호공(瓠公)이 월성 서쪽 마을을 지나가는데 마을 옆의 시림(始林)이 온통 환한 광명으로 차 있었다. 가까이 가 보니 자줏빛 구름이 하늘에서 그 숲속으로 드리워져 있었고, 그 구름 속으로는 황금으로 된 궤(櫃) 하나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다. 그 나무에는 흰 닭 한 마리가 울고 있어 이 광경을 탈해왕에게 고하자 왕이 거동하여 궤를 열어 보니 그 속에는 한 사내아이가 누워 있다가 일어났으므로 그 아이를 ‘알지(閼智)’라 했다. ‘알지’란 순우리말로 ‘아기’를 뜻한다. 탈해왕이 ‘알지’를 안고 궁으로 돌아와 태자로 삼았으나 알지는 왕위를 파사에게 양보했다. ‘알지’는 금궤에서 나왔다고 해서 성을 김(金)으로 하였다. 그 후 ‘알지’의 6대손인 미추가 김씨로는 최초로 신라왕이 되었다. 현재 계림에는 약 100여 그루의 고목이 우거져 있으며, 1803년에 세운 비가 비각 속에 서 있다

체험학습 과제

1

1-1. 계림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계림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계림에 있는 비각에 있는 비는 언제 세워진 것인가를 조사 토론하여 기록하세요.

3

계림 속에 세워져 있는 향가비를 찾아 어떤 노래인지 기록하세요.

기수 문제번호 등록일

 

 

12.경주 향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1호)

창건 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 때 빼어난 유학자들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의 중등교육과 지방민의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신라 신문왕 2년(682) 국학이 설치되었던 곳이라 한다. 그 뒤 1492년(성종 23) 경주부윤 최응현이 중수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대성전이 소실되어 위패를 도덕산 두덕암으로 옮겼다가 1600년(선조 33) 경주 부윤 이시발이 대성전과 전사청을 중건하고 위패를 다시 돌려 안치하였다. 1614년(광해군 6) 부윤 이안눌이 명륜당을 중수하고 동서 양무를 중건하였으며, 1668년(현종 9)에 보수하였다.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19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명륜당·동무·서무·전사청·내신문 등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대성전에는 5성인, 송나라 2현, 우리나라 18현인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전답과 노비·전적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현재는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하고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으며, 전교 1명과 장의 수 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체험학습 과제

1

1-1. 조선시대 선비들이 학습하던 명륜당 앞에서 건물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향교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경주 향교가 가지는 구조상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인가를 토론하고 기록하세요.

3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인 향교와 서원은 어떤 관계인지 조사 토론하고 기록하세요.

기수 문제번호 등록일

 

 

13. 경주 최부자댁  

(국가민속문화재 제27호)

경주 최부자댁

경주 최씨 가암파[佳巖波 혹은 정무공파貞武公波]의 분파인 동파東派[혹은 가암삼파佳巖三派] 종가이다. 분파 시조인 송정 최동량(松亭 崔東亮 1598~1664)은 정무공의 셋째 아들이므로 삼파라고도 하고 내남의 동쪽에 있다고 하여 동파라고 한다. 정무공 최진립(貞武公 崔震立 1568~1636) 이래 내남에 살고 있었는데, 최동량 때인 1644년에 이조리에서 고택 일부를 헐어 교촌에 옮겨 짓고 이사하게 되었다. 교촌에는 옆에 향교가 있음으로 해서 부잣집의 큰 저택이 들어서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기둥을 30cm정도 잘라서 가옥의 높이는 향교 건물보다 높지 않도록 제한하는 세심함을 베풀어 겸허한 삶의 철학을 반영하였다고 한다. 이때 지어진 건물은 교동법주를 빚고 있는 가옥이다. 새집 후원 일대에는 소나무와 느티나무를 비보수로 조성하여 향교 송단과 연결하였다. 최진립의 8세손인 용암 최기영(龍庵 崔祈永 1768~1834)의 장남 응서 최세린(應瑞 崔世麟 1791~1846)이 1831년에 현재의 최씨 고택 자리에 새로이 큰 집을 짓고 내남에서 이사하였다. 이때 동쪽에 인접한 향교보다 1m 이상 낮추어 터를 정지하였다. 또 향교와 담장이 닿지 않도록 사이에 하인들이 거주하는 가랍집을 지어 차단하였다. 원래 99칸이었다고 전하는데 사랑채, 안채, 사당, 문간채, 고방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후 후손들은 앞쪽으로 분가하여 현재와 같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향교가 있는 곳이므로 행정단위로는 교동(校洞)이라 하지만 전통적으로 교촌(校村)이라 불러 왔기에 여기서도 이를 사용한다.

체험학습 과제

1

1-1. 경주 최부자댁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경주 최부자댁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교촌 경주 최씨 동파 종가댁에 전하는 여섯 가지 가르침[六家訓]이 있습니다. 이를 조사하여 적어 보세요.

3

경주 최부자댁

그림의 석조 유물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세 요. 또 무엇에 쓰이던 유물인지를 생각해보세요.

4

교촌 경주 최씨 동파 종가댁은 벼슬을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는 가훈이 내려옵니다. 실제로 조선시대 중기 이후 9대에 걸쳐 진사를 배출하였다. 이렇게 높은 벼슬을 하지 못하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 토론하고 기록하세요.

5

“재산은 만석 이상의 재물을 모으지 말 것, 흉년이 들면 남의 논밭을 사들이지 말 것, 더하여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들 사실을 통해 집안 경제를 운영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데 무엇을 가르치고자 한 것일까를 토론하고 기록하세요.

기수 문제번호 등록일

 

 

14.경주 월정교  

(사적 제457호)

월정교는 일정교와 함께, 『삼국사기』 경덕왕조의 “경덕왕 19년 2월 …… 궁의 남쪽 문천상에 춘양(春陽), 월정(月淨) 두 다리를 놓았다.”라는 기록에 전하는 교량으로 판단되고 있다. 시대가 변천되면서 월정교(月淨橋)는 월정교(月精橋)로, 춘양교(春陽橋)는 일정교(日精橋)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이들은 각각 달과 해의 정령을 상징하는 월정교와 일정교로 이름이 정해진 것으로 여겨진다. 월정교는 남·북편 교대와 4개소의 주형 교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길이는 약 60.57m로 추정되며, 교각 사이에서 불에 탄 목재편과 기와편이 수습된 것으로 보아 교각 상면에 누각 건물 형태로 된 누교(樓橋)였을 것이라 추측한다. 2000년대 들어 복원하는 공사가 계속되고 있다.

체험학습 과제

1

1-1. ‘월정교’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월정교’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월정교’ 다리발을 살펴보면 단면이 직사각형이 아니고 남천의 상류와 하류 방향으로 뾰족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하였을 때의 장점은 무엇인지 토론하여 기록하세요.

3

‘월정교’는 하류쪽으로 10여 m되는 곳에 나무로 된 다리를 나란하게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두 다리는 동시에 있었을까요? 동시에 있었다면 왜 두 개가 필요했을까를 토론하고, 기록하세요.

기수 문제번호 등록일

 

 

15.경주 월성  

(사적 제16호)

경주 월성

월지 서남편에 있는 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왕궁이었으며 사적 제16호이다. 흙과 돌로 쌓은 도성으로 현재 부분적으로 성벽과 건물지가 있다. 이러한 신월성은 경주 시가지를 중심으로 보아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행정구역상으로는 경주시 인왕동 449-2번지이다. 남천(문천 또는 사천) 북쪽에 접한 낮은 언덕을 연결하고 자연 지세를 최대한 이용해 성벽을 쌓았기 때문에 성곽의 형태가 반월형(사실은 초승달 모양)을 이루고 있다. 동쪽, 서쪽, 북쪽은 낮은 12개의 산봉을 연결하여 쌓았고, 남쪽은 자연 지세를 많이 활용하여 쌓았는데, 지형이 절벽을 이루기 때문에 성벽의 외부를 손질하는 정도로 쌓았을 것이라 추측되고 있다. 성벽 기저부까지 남천의 물이 와 닿고 있다. 성안의 전체적인 지세는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으며, 성안 지반의 높이는 성밖보다 약 7m가 높고, 남천을 접한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세 성벽은 약간 높은 언덕과 같이 토루가 둘러져 있다. 현재 성벽 중 가장 높은 곳은 국립경주박물관과 연접한 곳인 동남쪽으로 약 10~18m가 된다. 성의 규모는 동서 860m, 남북 250m, 성 전체 둘레는 1841m, 면적은 1830.600m2이다. 월성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은 일제강점기시대와 1979과 1980년에 부분적인 발굴을 하였던 적이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월정교 부근의 성벽을 조사하였는데, 성벽의 너비는 36척(10.9m), 높이는 중앙에서 12척(306m) 내외였다고 한다. 또한 성벽 밑은 김해식 토기를 포함한 철기시대 문화층이 있었다. 1979~1980년에 있었던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발굴은 월지로 통하는 동북문지로 토성의 기단부 석렬과 구조물에 대한 흔적 등이 확인되었다. 원래 월성 안에는 남문과 정문격인 귀정문, 북문, 인화문, 현덕문, 무평문, 준례문 등의 문과 월상루, 망덕루, 명학루, 고루 등의 누각, 왕이 정사를 보던 남당, 신하의 조하를 받고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조원전, 양궁, 사량궁, 대궁을 관할하던 새성 등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터만 추정될 뿐이다. 월성에는 호공과 석탈해, 비담과 염종의 난 때에 김유신과 김춘추가 이곳을 근거지로 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경덕왕과 충담사의 찬기파랑가 등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월성 안에는 경주 석씨의 시조를 모시던 숭신전도 있었으나 1980년 동천동 석탈해왕릉 동남쪽으로 옮겼다. 동쪽의 명활성, 서쪽의 서형산성, 남쪽의 남산신성, 북쪽의 북형산성이 나성의 역할을 하였다. 월성 주위에는 사방으로 해자가 둘러져 있어 성을 호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월성 내부와 해자에 대한 대대적인 발굴이 진행 중에 있어 멀지 않아 그 전모가 밝혀질 것으로 기대된다.

체험학습 과제

1

1-1. 월성의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월성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월성 안에서 조선시대의 경복궁 근정전처럼 임금님이 정사를 보던 중심 건물인 조원전은 어디에 있었을까 추정해 보세요. 그곳으로 추정하는 근거는 무엇인가를 기록하세요.

3

월성 안 발굴현장 서남쪽에서 그림의 유적을 찾아보세요. 어떤 유물일까 토론하고 기록하세요.

과제
기수 문제번호 등록일

 

 

16.경주 석빙고  

(보물 제66호)

경주 석빙고 월성 북쪽 성루 중간 지점에 성루를 자르고 남쪽에 입구를 내었으며 안으로 들어갈수록 바닥이 경사지게 하여 물을 성 밖으로 배출하도록 설치돼 있는데, 보물 제66호이다. 내부는 동서로 무지개 구조[홍예] 5개를 틀어 올리고, 홍예와 홍예 사이의 천장에는 세 곳에 배기공을 설치하였다. 출입구 높이는 1.8m, 너비 2.0m의 크기로 만들고, 계단을 설치하여 밑으로 내려가게 되어 있다.『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3대 유리왕 때부터 얼음 창고가 있었다고 하였으며, 『삼국사기』에는 지증왕 6년 11월에 유사에게 명하여 얼음을 저장하도록 하였다는 기사가 보인다. 이로 미루어 보면 신라시대에는 일찍부터 얼음을 저장하여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경주시 내남면 노곡리에서도 근래에 얼음저장고로 보이는 유적이 발굴되기도 하였다. 월성에 있는 현재의 석빙고에 대해서는 신라시대에 축조한 것을 현재 위치로 옮겼다는 설과 조선시대 축조설로 나눌 수 있다. 신라시대 축조설은 일제강점기시대 일본인학자들에 의해 주장되었고, 조선시대 축조설은 1960년대에 이화여대 진홍섭 교수에 의해 제기되었다. 진홍섭 교수는 조선시대에 이곳에 석빙고를 설치한 이유로 첫째, 성 남쪽에 남천이 흐르고 있어 채빙하기에 편하다는 점, 둘째, 성루의 경사를 이용할 수 있었다는 점, 셋째, 전체적인 구조와 설계가 조선시대에 세워진 청도 석빙고, 대구광역시 기상대 내에 있는 석빙고비명, 안동 석빙고, 경남 창녕읍 석빙고 등과 같다고 하였다. 이외에도 축조년대를 알 수 없는 석빙고인 창녕군 영산면 석빙고, 달성군 현풍읍 석빙고 등을 예로 하면서 모두 조선시대로 축조연대를 <석빙고 내부 입구 계단> 추정했다. 아울러 경주의 석빙고도 경상북도, 경상남도의 석빙고와 마찬가지로 18세기 전반에 축조되었을 것이라 하였다. 이 석빙고 서쪽에 있는 석빙고 관련 비에 의하면 1738년(영조14년)에 당시 경주 부윤이던 조명겸이 나무로 된 얼음 창고[빙고]를 돌로 된 얼음 창고로 축조하였다는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또 석빙고 입구 이맛돌에는 “숭정기원후 재신유 이기 개축(崇貞紀元後再辛酉移基改築)”이라고 쓰여 있어 4년 뒤에 동쪽으로 100m 정도 옮겨 현재 위치에 다시 쌓았음을 알 수 있다. 옮기기 전의 옛 위치는 서쪽에 남아 있다.

체험학습 과제

1

1-1. 석빙고 사진을 찍어 보세요.
1-2. 석빙고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2

경주 석빙고는 신라시대에 축조된 것인지, 아니면 조선시대에 축조된 것인지 하나를 선택하고,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기록하세요.

3

그림은 석빙고의 횡단면도와 석빙고 홍예 사진입니다. 무지개 구조[홍예]의 장점이 무엇일까를 토론하고 기록해 보세요.

경주 석빙고

4

석빙고의 종단면도입니다. 위쪽 배기공은 왜 필요했는가를 기록하세요.

경주 석빙고

5

그림은 석빙고의 평면도입니다. 이곳 경주 석빙고 출입구가 향하는 방향을 기록하세요.

경주 석빙고
기수 문제번호 등록일